[포도나무 아래서]〈15〉제발 내 사랑을 가만히 놔두렴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11월 2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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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레이션 김수진 기자 soojin@donga.com
일러스트레이션 김수진 기자 soojin@donga.com
신이현 작가
신이현 작가
“어, 얜 누구냐. 우리 집 깡패잖아. 그런데 왜 이러고 있지?”

레돔이 발견한 것은 말벌이었다. 늦가을 추위에 비틀거리며 엎어져 있었다. 지난여름 동안 우리 집 작은 마당을 전쟁터로 만들었던 그 용맹함은 어디로 갔는지 곧 죽을 것처럼 보였다. 말벌이 새끼를 까면서 전쟁은 극한으로 치달았다. 새끼들은 맛있는 것을 내놓으라고 맹렬한 기세로 꿈틀거렸고 전사들은 사냥을 나섰다. 숲에서부터 몇 킬로미터를 날아와 그들이 발견한 것은 평화로운 우리 집 꿀벌 마을이었다.

“오, 저기에 귀여운 꿀벌들이 있군. 모두 세 통, 상황 파악을 했으니 오늘은 여기서 철수.”

벌통을 발견한 말벌 선발대는 결전의 날을 잡아 다시 왔다. 꿀벌들은 날갯짓을 하며 개망초 꽃 속에 온몸을 던져 꿀 따기에 여념이 없었다. 그들의 유전인자 속에 새겨진 것은 이 햇살이 사라지기 전에, 이 꽃들이 시들기 전에 벌집 가득 황금 꿀을 채워야 한다는 것뿐이었다, 말벌에게도 새끼가 있듯이 꿀벌에게도 부화될 알들이 벌집 가득 차 있었다.

꿀벌들은 새끼들에게 먹일 꽃가루를 뭉쳐서 양 옆구리에 터지도록 끼어 안고 벌통을 향해 날아갔다. 그 순간 말벌 전사가 나타나서 가볍게 꿀벌을 낚아채갔다. 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어떤 것은 꿀을 가득 안은 채, 어떤 것은 양 옆구리에 화분을 뭉쳐 안은 채 말벌에게 잡혀갔다. 벌통에 비상벨이 울리고 꿀벌들은 필사의 방어를 시작했다.

가장 먼저 입구를 봉쇄했다. 서로 온몸을 붙여서 거대한 꿀벌 장막으로 대항했다. 말벌은 탱크처럼 튼튼한 다리로 작고 귀여운 꿀벌들을 후려쳤다. 바닥에는 순식간에 꿀벌들의 사체가 수북이 쌓였다. 그러자 어디서 나타났는지 개미들이 죽은 꿀벌들을 끌고 가느라 분주했다. 이렇게 끌려간 꿀벌들은 머리와 꼬리가 잘린 몸통으로 어린 말벌의 먹잇감이 되었다.

‘앗, 인간이다. 철수!’

농부 레돔이 나타나자 말벌들이 즉시 전쟁을 중단하고 하늘 높이 사라졌다. 농부는 처참한 광경 앞에 분노했다. 그때부터 틈만 나면 잠자리채를 들고 벌꿀 통을 엄호했다. 동네 고양이 한 마리가 지나다 그 꼴을 보고 다가와 바닥에 등을 비비며 관심을 보였다. 농부는 이 고양이를 좋아하지 않았다. 마당에 나타나기만 하면 쫓아버렸다. 그런데도 고양이는 매일 왔다.

문제는 이 고양이의 취미가 새 사냥이라는 것이었다. 나뭇가지에 앉은 새를 귀신처럼 낚아챘다. 새를 쥐 잡듯이 요리조리 가지고 놀다가 겨우 숨만 붙은 것을 문 앞에 다소곳이 놓고 사라졌다. ‘프랑스 농부 아저씨, 내 솜씨 어때요?’ 하고 자랑하는 전리품이라고 한다.

이 선물을 받을 때마다 농부는 미친 듯이 화를 냈다. 세상에서 그가 제일 사랑하는 것이 새였다. 새를 부르기 위해 나무에 과일을 매달고 해바라기씨 먹이를 주었다. 새소리가 들리면 애인이라도 온 듯 버선발로 달려 나갔다. 새들은 나무에 붙은 벌레들을 잡아먹는데, 특히 뚱뚱한 말벌을 아주 좋아한다고 했다. 그런데 고양이가 얼쩡거리면서부터 새들이 순식간에 사라져 버린 것이다. 새들이 사라지자 말벌들이 더 극성이고, 그러니 저 고양이가 문제라고 했다. 농부에게 고양이는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다면서 미워했다.

여름 내내 농부의 애간장을 태웠던 말벌들은 이제 죽을 준비에 들어갔다. 상추를 뜯어 먹던 메뚜기도 진딧물도 다 사라지고 봄이 올 때까지 긴 휴전이 시작됐다. 이제 마당에 마주한 것은 농부와 고양이, 둘뿐이다. 낮 동안 고양이는 돌바닥에 등이나 비비대다가 밤이면 슬슬 사냥을 나갔다. 사냥에 성공한 날이면 전리품을 현관문 앞에 두는 것을 잊지 않았다. 들쥐나 새였다. 농부 아저씨, 나 아직 죽지 않았다고요. 문을 열고 나오는 레돔의 반응을 멀찍이서 살피며 이렇게 말하는 듯했다. 농부의 입에서 폭탄과 같은 욕이 터져 나왔다. 여름 전쟁이 끝나고 바야흐로 겨울 전쟁이 시작되었다는 포고였다.
 
신이현 작가

※ 프랑스인 남편 도미니크 에어케 씨와 충북 충주에서 사과와 포도 농사를 짓고 살고 있습니다.
#말벌#고양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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