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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체류 5000일, 내 몸에 김치를 많이 담았다고 생각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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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체류 5000일, 내 몸에 김치를 많이 담았다고 생각했는데…

폴 카버 영국 출신 서울시 글로벌센터팀장입력 2018-11-12 17:22수정 2018-11-12 2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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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장기 정착하기로 했으면 당연히 한국 문화에 잘 적응하려고 노력할 필요가 있다. 그런데 이 ‘노력’이라는 단어는 어떻게 보면 상당히 주관적이다. 내가 노력했는지를 누가 판단할 수 있을까. 게다가 노력했는데 결과가 잘 나오지 않으면 어떻게 해야 할까? 한국어 공부를 열심히 했는데도 불구하고 잘 구사하지 못하는 친구들이 있다. 그들이 많은 노력을 했다고 칭찬해야 하나? 아니면 의사소통이 수월하지 않으니 비난해야 할까? 최근 내게 일어난 여러 가지 일 때문에 이런 철학적인 고민을 하고 있다.

최근 외국인 10명과 같이 한 방송 예능에 몇 번 출연했다. 프로그램은 연예인과 한국인보다 한국을 더 잘 아는 외국인의 맞대결 퀴즈쇼다. 촬영하다 보면 정확한 발음으로 말하거나 어려운 질문에 정답 할 때 “거의 한국사람 다 됐다”는 말이 나온다. 사실 한국에서 살다가 보면 어느 외국인이나 비슷한 말을 자주 듣는다. 하지만 한국에 동화하려고 노력해도 어느 정도의 유리 천장은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지난 주 미국 중간 선거에서 한국계가 하원의원으로 당선됐는데, 한국에서 비슷한 상황이 발생할 날은 조금 더 시간이 걸리지 않을까 생각한다. 내 스스로 얼마나 한국화가 됐는지도 모르겠다.

반면 한국에 정착하기로 결정했다면 모국과의 관계는 어디까지 유지해야 할까? 요새 영국은 브렉시트가 가장 큰 이슈다. 브렉시트는 내 귀국에도 큰 영향을 끼치는데, 내게는 남의 일처럼 느껴진다. 몇 주 전에 영국을 다녀왔는데, 그리웠던 영국의 모습을 보니 무척 반가웠지만 다시 들어간다면 적응해야 할 것이 많겠다고 느꼈다. 비행기 탑승 등 계속 뭔가 어색한 느낌이 쌓였다. 항공 안전 동영상에 등장하는 배우 7명 중 마이클 케인을 포함해서 4명은 알고 있었지만 나머지 3명은 누구인지 몰랐다. 이런 동영상에 나올 정도면 상당한 스타인데도 내가 전혀 알 수 없는 사람들이었다.

또 런던 히스로국제공항에 도착해서 물을 좀 사려고 편의점에 갔을 때 지갑에 남은 돈을 꺼내 계산하려고 하니 점원으로부터 거부를 당했다. 그동안 영국 지폐와 동전 일부가 새로 생겼고 내가 갖고 있던 옛날돈은 은행에서만 교환할 수 있다.

물론 한국에 사는 동안에도 영국 소식을 계속 알아보고 있다. 하지만 소식의 중요성이 내게 약화되고 있다. 10년 전에 처음 왔을 때는 실시간 뉴스를 보려고 했고 매일 새벽에 일어나서 잉글랜드 축구 경기를 보려고 했다. 이제는 틈틈이 시간이 날 때 뉴스를 읽고 축구는 아침에 일어나 결과만 확인한다. 경기 주요 장면은 생각이 날 때만 본다. 그래도 한국의 빠른 인터넷 덕분에 고향 뉴스를 받아보는 게 어렵지 않다. 20년 전 인터넷 초기 시대에 중국 베이징에 유학 갔던 나는 할머니의 별세 소식을 일주일 뒤에나 들을 수 있었고, 온 세상으로 순식간에 전달된 다이애나 왕세자비의 별세도 엄청 뒤늦게야 알았다.

고향 소식을 접하려면 BBC 등 뉴스 매체뿐 아니라 소셜네트워크(SNS)나 오프라인 모임 등 비공식 채널도 중요하다. 그래서 한 웹사이트에서 ‘주한 영국인 커뮤니티’에 가입했다. 한국 거주 베테랑으로 신참에게 서울생활 관련 꿀팁(제일 많이 묻는 질문은 영국 음식을 찾을 수 있는 곳이다)을 알려주고 대신 신참과 영국송환자들로부터 영국의 주요 소식(최근 볼만한 영국 드라마 등)을 받고 있다.

지난 주 수요일은 내가 한국에서 체류한지 5000일째 되는 날이었다. 그런데 언제부터 한국인으로 인정받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 11일은 그것을 판단하기 좋은 기회였다. 이 날은 한국에서 ‘빼빼로 데이’이지만 영국에서는 제1차 대전 종전 100주년 기념일이었다. 분위기가 완전히 다르다. 여기저기서 빼빼로 몇 박스를 받았지만 나에게 더 의미 있는 일은 종전 기념일이었다. 그래서 가슴에 양귀비꽃(참전용사 모금 기념품)을 달고 영국 성공회교회에 가서 휴전 기념으로 오후 8시(영국 오전 11시) 2분 묵념을 했다. 내 몸에 김치를 많이 담았다고 생각했지만, 한국인으로 변신하는 일은 아직 미완성이며 진행 중이다. 영국피가 아직 정맥 속 깊이 흐르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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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카버 영국 출신·서울시 글로벌센터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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