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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신의 늪’에 빠진 학생들… “학교도 친구도 못 믿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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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신의 늪’에 빠진 학생들… “학교도 친구도 못 믿겠어요”

구특교기자 , 김정훈기자 입력 2018-09-15 03:00수정 2018-09-15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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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클리 리포트]‘시험지 유출 의혹’ 숙명여고 사태 한달 《사교육 1번지인 대치동 학원가와 가까운 숙명여고에서 시험지 유출 의혹이 불거진 지 한 달. 학교는 불신과 불안의 늪에 갇혔다. 학생들은 자신의 등수를 믿지 못하고, 동고동락해 온 친구를 의심한다. 내신 성적을 사수하려 ‘공부 기계’로 살아온 학생들에게 100등을 건너뛰는 건 상상 불가다. 고3들은 이번 파문이 ‘숙명 디스카운트’로 이어질까 전전긍긍. 학부모들은 촛불을 들면서도 자녀가 불이익을 당할까 마스크를 쓴다. 지금 그 명문여고 교실에선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을까.》



“이게 뭐야. 우∼.”

지난달 31일 오전 서울 강남구 숙명여고의 한 교실. TV를 통해 교내 방송을 지켜보던 학생들 사이에서 야유가 터져 나왔다. 교장을 비롯한 학교 관계자들이 전 교무부장 A 씨의 쌍둥이 딸(2학년)이 나란히 문·이과 전교 1등을 한 것과 관련한 의혹을 해명하는 ‘긴급 방송’이었다.

‘숙명여고 시험지 유출 의혹’에 대한 서울시교육청의 감사 결과가 발표되고 이틀이 지난 이날 숙명여고는 오전 수업 시간을 30분가량 줄이고 방송을 했다. 학생들은 뭔가 중요한 발표를 하거나 학교 측이 진심 어린 사과나 위로를 하지 않을까 기대를 걸었다. 하지만 방송의 주요 내용은 ‘각종 유언비어에 흔들리지 말고 열심히 공부해 행복을 지키는 숙명인이 되자’, ‘숙명을 침몰시키려는 사람들 속에서 우리는 하나가 돼야 보란 듯이 의연히 노를 저어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훈화였다.

방송 중간중간에 학생들은 웅성거렸다. 방송이 끝나자 일부 학생은 책을 집어던지는가 하면 “학교가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한다”는 등 거친 말까지 했다고 한다. 숙명여고 2학년 B 양은 “학교가 사실상 학생들의 입을 막으며 잘못을 감추려고 하고, 여러 의혹에 대해선 유언비어라고 변명만 하는 모습에 화가 났다”고 말했다.

지난달 중순 서울 강남의 학원 정보 사이트에서 처음으로 ‘숙명여고 사태’가 시작된 지 약 한 달이 지났다. 여론이 들끓으면서 시교육청 감사가 실시됐고 숙명여고의 교장과 교감이 바뀌었다. 시교육청은 감사 결과 A 씨가 쌍둥이 딸이 속한 학년의 중간·기말고사 시험지와 정답지를 총 6차례 검토, 결재했고 혼자서 최대 50분 동안 시험지를 검토한 적이 있다고 밝혔다. 하지만 시험지 유출 여부는 밝혀내지 못한 채 공을 경찰에 넘겼다. 대학수학능력시험을 앞두고 마지막 모의 평가가 치러진 5일, 경찰이 학교를 압수수색하며 분위기는 더욱 뒤숭숭해졌다.

학생과 학부모들은 한편으로는 불안하고 한편으로는 불만이 많지만 ‘입시’와 ‘성적’이라는 엄연한 현실 앞에서 속 시원하게 소리를 내지도 못하고 있다. 학부모들은 가면을 쓴 채 밤마다 교문 앞에 모여 학교와 과도한 내신 경쟁이 벌어지는 교육 정책에 항의하는 촛불집회를 벌이는 것으로 분노를 표출할 뿐이다. 학생들은 불만을 억누르고 대학 수시전형 원서 접수, 2학기 중간고사, 수능 준비에 매진하려 안간힘을 쓰는 모습이다. ‘숙명여고 사태’ 한 달, 지금 숙명여고 안팎에서는 무슨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 것일까.

○ “아무도 못 믿겠다”…불신에 빠진 학생·학부모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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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학부모 C 씨는 숙명여고 2학년에 재학 중인 딸에게서 가슴 철렁한 이야기를 들었다. 딸이 “학교를 더 이상 믿을 수 없어 자퇴하고 싶다”고 토로한 것. 늘 학생들을 다정다감하게 대해줘 인기가 많았던 A 씨에 대한 배신감이 컸다고 한다. 당황한 C 씨는 “A 씨 딸들도 학교를 다니고 있는데 왜 네가 학교를 그만두려고 하느냐. 이번 일이 어느 정도 마무리되면 다시 생각하자”고 딸을 달랬다.

‘불신의 늪’에 빠진 학생들은 학교도, 선생님도, 친구도 믿지 못하겠다고 하소연한다. 수업 시간에 일부 선생님은 “쌍둥이 딸과 관련된 이야기를 다른 사람들에게 하지 말라”고 입단속을 한다. 한 교사가 학생들에게 “쌍둥이 딸을 공격하지 말라. 불이익을 당할 수 있다”고 말했다는 이야기도 떠돈다. 학부모 D 씨는 “학교폭력 가해자가 될 수 있다는 이야기로 들렸다”며 “학교폭력대책자치위원회(학폭위)에 가게 되면 대입에 손해를 본다는 점을 악용하는 것 아니냐”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 때문에 학교 방송이나 선생님의 발언을 녹음해 부모에게 알려주는 학생도 있다고 한다.

학부모 E 씨는 “예전부터 학교 관계자의 딸들이 숙명여고에 입학해서 좋은 내신을 받고 명문대에 갔다는 이야기들이 있었다”며 “그래서 A 씨의 쌍둥이 딸이 숙명여고에 입학할 때부터 1년 넘게 많은 사람들이 주시해왔다”고 전했다.

학교 주변에서 ‘A 씨의 두 딸이 전학을 간다’는 소문이 돌았지만 사실이 아니었고 두 학생은 현재 이 학교에 재학 중이다. 이를 불만스럽게 여기는 학생도 있다. 숙명여고 2학년 F 양은 “두 학생이 다른 친구들에게 엄청난 피해를 줬는데도 징계나 처벌을 받지 않는 게 속이 상한다. 우리들끼리 뒷담화를 자주 한다”고 말했다.

○ “불이익 당할까 봐…” 분노하지만 나서진 못해

이처럼 불신은 깊어졌지만 그렇다고 누구도 앞에 나서서 이야기를 하려 하지는 않는다. 10일부터 대학 수시전형 원서 접수가 시작됐고, 이달 28일부터는 2학기 중간고사가 시작된다. 학교에 밉보이면 원서를 쓸 때나 중간고사에서 불이익을 받을 수 있다는 불안감이 퍼져 있다. 치열한 내신 경쟁을 벌이는 현실에서 조그마한 불이익이라도 받으면 치명타가 될 수도 있다. 2학년 G 양은 “우리가 목소리를 내면 모든 게 제자리로 돌아갈 것이라는 희망이 잠깐 있었지만 변화는 없고 피로감이 쌓인다”며 “우선은 중간고사가 코앞이라 내 공부에 집중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학부모들도 아이들의 ‘학습권 보장’을 무시할 수 없다고 털어놓는다. 아이를 대학에 보내려면 분하더라도 조용히 지낼 수밖에 없는 처지라는 것이다. 학부모 H 씨(49·여)는 “부모의 마음으로는 학교의 잘못된 부분을 바로잡는 것보다 우리 아이가 피해를 입지 않는 게 더 중요하다. 시간이 흐르면서 ‘이 학교만 그런 것도 아닐 텐데’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고 푸념했다.

11일 오후 8시 숙명여고 교문 앞에는 30여 명의 학부모가 참석해 촛불집회를 이어갔다. 학부모들은 ‘양심을 가르치지 않는 학교가 학교냐’는 등의 구호를 함께 외쳤다. 하지만 이들은 모두 마스크와 캡모자로 얼굴을 가렸다. 혹시라도 아이가 피해를 당하지 않을까 걱정이 돼서다. 집회 참가자인 학부모 I 씨는 “잘못된 것을 보고 도저히 침묵할 수 없었지만 내 딸이 불이익을 받을 수 있다는 위험 때문에 얼굴을 가리고 매일 집회에 참가한다”고 말했다.

학생과 학부모들은 익명의 공간을 이용해 목소리를 내기도 한다. 주로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와 강남 학원 정보 사이트의 게시판에 의견을 내놓는다. 이들 가운데에는 판검사, 정치인, 의사 등 이른바 ‘사회지도층’인 학부모들이 상당수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얼굴을 알아보는 사람이 많기 때문에 집회에 참석했다가 만에 하나 얼굴이 드러나면 아이가 선생님에게 눈총을 받을까 걱정된다고 한다.

○ 치열한 내신 경쟁에 3년 내내 살얼음판

오후 4시 반경 수업이 끝나면 대부분의 숙명여고 학생들은 대치동 학원으로 이동하거나 개인 과외를 받는다. 학원 수업을 4, 5개 받는 학생이 흔하다. 성적이 떨어지는 과목에 대해 3곳 이상의 학원에서 수업을 듣는 학생도 있다. 수능도 중요하지만 수시전형으로 대학에 들어가려면 치열한 내신 경쟁을 이겨내야 하기 때문이다.

이번 사태가 급속히 확산된 것은 명문고인 숙명여고에서 전교 순위 100등 밖이던 학생이 1년 만에 1등이 되는 게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전제에서 시작한다. 학교 시험에서 한 문제를 틀리면 전교 성적이 30등 이상 떨어질 때가 많다. 숙명여고 이과 2학년 학생 J 양은 “이과에서 일본어는 비중이 낮아서 상대적으로 경쟁이 덜 치열한데도 95점을 받으면 3등급”이라고 말했다. 잠시라도 긴장을 늦추면 한순간에 등수가 떨어지고 회복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다. 학생과 학부모들은 ‘공부 기계’가 돼야만 겨우 성적을 유지하는 경쟁 시스템 속에서 늘 살얼음판을 걷는 심정이라고 했다. 3년 내내 이어지는 긴장감을 견디지 못하고 ‘내신파(수시에 초점을 맞추는 학생)’에서 ‘수능파(정시에 목표를 두는 학생)’로 바꾸는 학생들도 있다.

3학년 K 양은 “워낙 경쟁이 치열하다 보니 등수를 하나 올리는 것도 힘들어서 내신은 1학년 첫 성적과 비슷하게 유지되는 게 일반적”이라며 “그런데 갑자기 A 씨 쌍둥이 딸의 성적이 수직상승을 하니 자녀들에게 답을 알려줬다는 의혹이 생기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번 사태가 벌어진 이후 처음 치러진 9월 전국모의평가에서 쌍둥이 자매가 어떤 성적을 받을지도 초미의 관심사다. 3학년 L 양은 “전국 단위 시험보다 내신 성적 올리는 게 더 어려운 만큼 숙명에서 내신 1등을 하면 당연히 전국 모의고사에선 최고 수준의 점수를 받아야 한다”고 말했다.

○ 다양한 후폭풍에 인근 지역도 들썩

숙명여고는 물론이고 인근 지역 학생과 학부모들도 이번 사태의 후폭풍을 우려한다. 3학년 학생들은 스스로를 ‘이번 사태의 최대 피해자’라고 불렀다. 입시가 코앞으로 다가왔는데 자칫 ‘숙명 디스카운트’가 생겨날 수 있다는 점을 우려한다. 숙명여고는 이른바 ‘강남 8학군’의 명문여고로 손꼽힌다. 이 때문에 숙명여고 학생들은 대학들이 숙명여고 내신에 신뢰가 높은 것으로 믿고 있다. 3학년 M 양은 “일부 내신이 낮은 선배들도 명문대에 진학한 경우가 있다고 들었다”며 “그런데 이번 사태로 학교에 대한 신뢰도가 낮아지면 입시에도 뭔가 불이익을 받지 않을까 걱정이 많다”고 말했다.

숙명여고와 재단이 같은 숙명여중 학생들도 관심이 많다. 숙명여고 진학을 앞둔 학생이 많기 때문이다. 숙명여중 학생들은 관련 기사와 이야기들을 매일 단톡방에서 공유하고 있다고 한다. 숙명여중 3학년 N 양은 “혹시 숙명여고의 명성이 낮아지는 상황이 지속되면 다른 학교에 지원할지 고민 중”이라고 말했다. 인근의 한 초등학생 학부모는 “중·고등학교를 어디로 보내야 할지 다른 학부모들과 이야기를 자주 나눈다”고 말했다.

인근 고등학교들은 숙명여고 사태의 불똥이 지역 전체로 확산될까 봐 노심초사하는 분위기다. 여론의 관심이 집중되면서 의혹 수준을 넘어 시교육청의 감사와 경찰의 수사로 이어진 것에 대해 충격이 크다. 서울 강남의 한 고교 교사는 “경찰 수사에서 뭔가 나오기라도 하면 여론이 악화되면서 수사가 확대될 수 있고, 그렇게 되면 ‘강남 8학군’ 학교 전체가 영향을 받을까 봐 숨죽이고 있다”고 말했다.

대치동 학원가에서는 다른 방향으로 파장이 나타나고 있다. 쌍둥이 딸이 다닌 대치동의 수학학원을 경찰이 압수수색하자 실제로 학교 시험지가 학원으로 들어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학부모들이 생겼다. 대치동의 한 보습학원 원장은 “‘몰래 시험 문제를 받으려면 학원에 돈을 따로 줘야 하는 것이냐’고 묻는 학부모도 있었다”고 말했다.

사건을 수사 중인 경찰의 부담은 커지고 있다. 학부모들 사이에서는 ‘시험지나 답안지를 몰래 적어서 보여줬다면 당사자 자백 말고는 별다른 물증이 없을 텐데 경찰이 증거를 찾기 어려울 것’이라는 전망이 우세하다. 당초 경찰은 추석 전까지 수사를 마치는 것을 목표로 잡았지만 쉽지 않다는 분위기다. 서울 수서경찰서 관계자는 “시교육청 감사 결과와 별반 다르지 않은 수사 결과를 발표했다가는 여론의 뭇매를 맞을 가능성이 높아 걱정이 크다. 주말도 없이 사건의 진실을 밝히기 위해 수사에 매진하고 있다”고 말했다.

구특교 kootg@donga.com·김정훈 기자
#숙명여고#시험지 유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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