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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파원 리포트]“더 강한 성폭력 방지 필요”… 美·유럽 ‘예스 민스 예스’로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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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파원 리포트]“더 강한 성폭력 방지 필요”… 美·유럽 ‘예스 민스 예스’로 간다

박용 뉴욕 특파원 입력 2018-08-20 03:00수정 2018-08-20 0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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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는 항상 ‘노 민스 노(No means no·상대가 거부한 성관계는 성폭력)’ 원칙을 이해하고 존중하고 준수해 왔습니다.” 미국 지상파 방송사 CBS 최고경영자(CEO) 레슬리 문베스는 지난달 “수십 년 전 일부 여성들에게 접근해 불편하게 했던 적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는 사과문을 발표했다. 30여 년간 여성 6명을 성적으로 괴롭혔다는 시사주간지 뉴요커의 보도가 나온 직후였다. 문베스 CEO는 노 민스 노 원칙 준수를 거론하며 성폭력 혐의를 부인했지만 미 여성계는 “노 민스 노 원칙이 낡은 무기가 됐다”며 발끈했다. 아예 적극적 동의가 없으면 성폭력으로 간주하는 ‘예스 민스 예스(Yes means yes·명시적으로 동의해야 정당한 성관계로 인정)’ 원칙을 도입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
 
○ 미투 운동으로 드러난 노 민스 노 원칙의 한계

박용 뉴욕 특파원
1990년대 캐나다에서 시작된 노 민스 노 원칙은 성폭력을 판단하는 핵심 기준처럼 인식돼 왔다. 하지만 ‘미투(#MeToo·나도 당했다)’ 운동 이후 한계가 드러났다. 작가이자 배우인 일리나 더글러스는 뉴요커와의 인터뷰에서 문베스 CEO가 자신의 경력에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생각 때문에 성폭력을 당할 때 ‘노’라고 말하지 못하고 농담으로 상황을 모면하려고 했다고 말했다.

성폭력을 당하는 순간엔 포식자에게 쫓겨 막다른 구석에 몰린 동물처럼 너무 놀라 움직일 수도, ‘노’라고 말할 수도 없는 ‘긴장성 무운동(tonic immobility)’이 나타난다는 지적도 나온다. 더글러스도 “문베스 CEO가 자신의 팔을 머리 위로 올려 꼼짝 못하게 한 뒤 방문을 막고 폭력적으로 키스했다”며 “덫에 걸린 동물처럼 너무 놀라 반응조차 하지 못했다”고 털어놨다.

2012년 독일 모델 기나리자 로핑크 성폭행 사건도 노 민스 노 원칙의 한계를 드러낸 사례로 꼽힌다. 로핑크가 한 남성을 향해 “그만하라”고 고함을 치는 동영상을 제시했지만, 재판부는 이 영상이 성관계가 아닌 동영상 촬영에 대해 반대 의사를 표시한 것이라고 판결하고 오히려 위증죄로 2000만 원이 넘는 벌금을 부과했다. 독일은 이후 2016년 7월 피해자가 저항을 하지 않았더라도 노 민스 노 원칙을 적용하는 법률을 마련했다.

○ “예스라고 하지 않으면 노”, 적극적 동의 요구

“안 돼. 당장 여기로 와야 해.”(할리우드 영화 제작자 하비 와인스틴)

“안 돼요. 난 원치 않아요.”(이탈리아 모델 앰브라 바틸라나 구티에레즈)

“너와 아무 일도 하지 않을 거야. 약속해. 지금 넌 날 창피하게 만들고 있어.”(와인스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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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리우드 거물 와인스틴에게 성추행을 당했던 22세 모델 구티에레즈는 2015년 3월 뉴욕 경찰의 도움을 받아 와인스틴의 성추행 현장을 녹음했다. 미 시사지 애틀랜틱은 ‘노 민스 노의 위험한 결점’이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와인스틴은 여성의 노를 무시하고 예스로 바꾸기 위해 온갖 수단을 다 동원했다”며 “여성을 심리적으로 무너뜨리고 죄책감을 느끼게 하고 회유하려고 지속적으로 노력했다”고 지적했다. 노 민스 노 원칙이 거부의 책임을 피해자에게 전가하는 방식이라는 비판이 나오는 이유다.

노 민스 노 원칙의 대안은 1991년 미 오하이오주 앤티오크대가 도입한 예스 민스 예스 원칙이다. 이 대학은 성관계 전에 ‘먼저 물어야 한다는 방침(Ask first policy)’에 따라 적극적 성적 동의를 처음으로 제도화했다. 이어 2014년 캘리포니아주, 2015년 뉴욕주가 대학들에 적극적 성적 동의를 요구하는 예스 민스 예스 법률을 마련했다. 이처럼 미국에선 성적 동의 여부를 성폭력 판단의 핵심 기준으로 보는 시각이 확산되고 있다.

○ “용의자를 범죄자 취급, 비현실적 발상” 논란도

예스 민스 예스 법안은 미투 운동을 타고 유럽에도 상륙했다. 스웨덴은 7월부터 성폭행의 정의에 적극적인 동의가 없는 성관계를 규정하는 법률을 시행했다. 지난해 12월 스테판 뢰벤 스웨덴 총리는 이 법안을 소개하며 “성관계는 자발적이어야 한다. 만약 자발적이지 않다면 법에 어긋난다. 확실치 않다면 삼가면 된다”고 말했다.

하지만 실효성과 효과는 여전히 논란거리다. 6월 미 미시간주 의회에서 적극적 성적 동의를 규정한 법안이 발의되자 “성욕이나 성행위의 낭만을 없애는 일”이라거나 “비현실적인 발상”이라는 비판들이 제기됐다. 독일의 한 칼럼니스트는 스웨덴 법안에 대해 “성관계까지 세세하게 관리하는 ‘전체주의적 노력(Orwellian effort)’”이라고 비판했다.

노 민스 노 원칙은 피해자가 원치 않는 성행위를 거부했다는 것을 입증해야 하지만, 예스 민스 예스 원칙은 가해자가 동의를 받았다는 사실을 입증해야 한다. 피해자 권리를 보장하는 반면 성폭력 혐의자를 범죄자로 간주해 ‘무죄 추정의 원칙’에 어긋난다는 지적도 나온다.
 
▼ “스마트폰 ♥ 눌러 ‘YES’ 증거 남기세요”… 성관계 동의 스마트폰 앱까지 등장 ▼

네덜란드 업체가 개발한 성관계 동의 앱 ‘리걸플링’ 화면.

캐런은 어느 날 파티에서 제프를 만났다. 그날 밤 둘은 캐런의 5층 아파트로 갔다. 제프는 방에 들어서자 스마트폰을 들고 손가락으로 뭔가를 두드렸다.

“딩동, 제프가 ‘성적 동의(sexual consent)’를 요청했습니다.”

캐런의 스마트폰으로 알림음과 함께 ‘하트(동의)’와 ‘×(거절)’ 표시 버튼이 첨부된 메시지가 날아왔다.

CNN은 이 가상 상황이 ‘블랙 미러’(미래의 가상 사회를 배경으로 한 미국 드라마)에 등장할 법한 미래 쇼크가 아니라 현실이라고 전했다.

네덜란드 블록체인 회사 리걸싱스가 3월 공개한 ‘예스 민스 예스(Yes means yes·명시적으로 동의해야 정당한 성관계로 인정)’ 애플리케이션인 ‘리걸플링(legalFling)’은 성관계 전 동의가 있었는지 없었는지를 명확하게 해준다. 이 회사는 스웨덴 정부가 지난해 12월 예스 민스 예스 원칙의 입법 계획을 밝히자 리걸플링 앱 개발에 나섰다. 스웨덴에서는 2014년 스톡홀름 근교에서 일어난 15세 소녀에 대한 집단 성폭행 사건 등에 연루된 성폭력 용의자들이 잇달아 무죄를 선고받자 이를 비판하는 ‘동의(#samtycke)’ 운동이 확산됐다. 이후 명시적으로 동의하지 않은 성관계를 성폭행에 포함시키는 형법 개정안이 올해 7월부터 시행됐다.

예스 민스 예스 원칙의 문제는 성적 동의에 대한 정의와 실행 방법이 모호하다는 점이다. 리걸플링은 이용자들이 성적 동의 여부를 즉석에서 확인하고 수정할 수 있는 법적 계약서와 같은 기능을 제공한다고 선전한다. 피임기구, 가학적 성행위, 음담패설 등 성관계와 관련한 조건을 설정하거나 불쾌한 성적 접촉의 중단을 요청하는 메시지를 보낼 수도 있다. 릭 슈미츠 리걸플링 공동개발자는 3월 뉴욕타임스(NYT) 인터뷰에서 “이용자의 프로파일은 블록체인 기술을 통해 저장한다”며 “성적 동의 과정은 시간까지 찍혀 암호화된다”고 말했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성적 접촉을 하면서 생각이 바뀔 때마다 앱을 작동시켜야 하는 건 비현실적”이라고 지적한다. 앱을 통해 성관계에 미리 동의할 경우 행동을 완수해야 한다는 부담을 가질 수도 있다. 앤드루 체카스키 변호사는 “디지털 기술을 통한 성적 합의는 소셜미디어나 문자메시지처럼 그 사람의 의도가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증거로 사용될 수 있을 것”이라면서도 “가정폭력범 등 범죄자들이 힘으로 (성적 동의를) 강요할 위험도 있다”고 우려했다. 범죄자가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수단으로 앱을 오히려 악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캘리포니아주가 2014년 대학생들을 성폭력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예스 민스 예스 법을 시행한 뒤에도 동영상으로 성적 행동에 대한 동의를 촬영해 저장하는 ‘위콘센트’, 상대방에게 스마트폰을 건네 성적 동의 의사를 확인하는 ‘Good2go’ 등 여러 앱들이 등장했다. 위콘센트는 현재 10만 개의 성적 동의 동영상을 관리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박용 뉴욕 특파원 parky@donga.com
#미투 운동#노 민스 노#예스 민스 예스#성폭력#리걸플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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