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의 향기]혁명 이후 러시아… 구시대 귀족이 간직한 ‘신사의 품격’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7월 2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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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스크바의 신사/에이모 토울스 지음· 서창렬 옮김/724쪽·1만8000원·현대문학

우아하기 이를 데 없는 소설이다.

실은 의아했다. 무대는 20세기 초 러시아. 시류에 영합하지 못한 구시대 백작 얘기가 왜 이다지 화제였단 말인가. ‘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 추천 도서’ ‘뉴욕타임스 58주 베스트셀러’…. 숱한 월계관들이 거품은 아닐지 흘겨보았다.

꽤 두툼하지만 스케일도 그리 크진 않다. 오로지 백작, 알렉산드로 로스토프의 일생이다. 끝내주던 귀족으로 누리고 살다가, 혁명 뒤 기거하던 호텔에서 평생 머물라는 ‘종신 연금 형(刑)’을 받는다. ‘도시의 로빈슨 크루소’까진 아니지만…. 2004년 영화 ‘터미널’의 빅터(톰 행크스)랑 비슷한 처지가 된다.

호텔이란 섬에 갇힌 백작은 그래도 의연하다. 스위트룸에선 쫓겨났지만, 일단 꿍쳐둔 돈푼이 꽤 있으니까. 게다가 고결한 품성과 박식함도 갖춘 편이라 사람도 잘 사귀고. 역사의 소용돌이에 예속됐을지언정, 우정과 사랑을 만나는 인생은 여기서도 굴러간다.

다시 말하지만, ‘모스크바의 신사’는 기품 있다. 사극(史劇)이라 그런지 클래식의 향취가 찌릿하다. 20년 동안 투자전문가로 일했다는 양반이 어찌 이리 글이 좋을꼬. 2013년 ‘우아한 연인’이 ‘원 히트 원더’가 아니었음을 또 한 번 홈런으로 증명했다.

게다가 고전의 외피를 썼지만, 굉장히 쫀쫀하다. 20세기 옛날영화가 아니라, 21세기에 새로 만든 싱싱한 역사물이다. 딱히 추리나 스릴러 같은 장르적 혼용도 없건만, 느슨한 구석이 없다. 백작 등등이 야밤에 몰래 부야베스(프랑스식 스튜)를 만들어 먹는 장면처럼 오랫동안 잔상에 남을 만한 대목도 잦다.

하지만 ‘선’이 뚜렷한 느낌도 지울 수 없다. 굳이 짚자면 ‘백인(白人)의 소설’이랄까. 뭔가 지적 허영심을 채워주는 분위기도 있고. 현지에선 반응이 엄청났다는데, 좀 살 만한 이들이 좋아했겠지 싶은 근거 없는 추측을 던져본다. 너무너무 재밌긴 한데, 괜히 삐죽거리게 된다. 잘 읽고 나선 웬 심통이람. 역시 신사가 되긴 글렀나보다.
 
정양환 기자 ray@donga.com
#모스크바의 신사#에이모 토울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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