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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과 내일/이명건]오만하고 비굴한 사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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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과 내일/이명건]오만하고 비굴한 사법

이명건 사회부장 입력 2018-06-14 03:00수정 2018-06-14 1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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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건 사회부장
“법관은 세상 사람으로부터 의심을 받아서는 안 된다.”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에 휩싸인 판사들이 가슴에 새겨야 마땅한 당부다. 판사들 다수는 억울하겠지만 지금 세상 많은 사람들은 의심을 떨치지 못한다. 양승태 전 대법원장 재직 중 대법원 법원행정처가 상고법원 도입을 위해 청와대와 판결로 거래를 하려고 했던 정황이 문건으로 드러났기 때문이다.

이 당부는 이미 65년 전 대법원장이 했다. 초대 대법원장 가인(街人) 김병로 선생의 1953년 10월 12일 법관 훈시 중 일부다. 그의 좌우명은 ‘계구신독(戒懼愼獨)’이었다. ‘늘 경계하고, 두려워하며, 홀로 있을 때에도 사리에 어긋남이 없도록 언동을 삼간다’는 의미다. 그는 이를 그대로 실천해 사법부의 기틀을 세웠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 ‘계구신독’을 양 전 대법원장도 강조했다. 2012년 4월 신임 법관 임명식에서 ‘국민의 법관에 대한 신뢰’를 언급하며 인용했고, 2014년 1월 가인 선생 50주기 추념식에서도 상세하게 소개했다. 그럼 양 전 대법원장은 ‘계구신독’을 실천했을까. 그랬는데도 억울하게 사법행정권 남용의 책임자로 몰린 것인가.

법조인은 대개 용어에 민감하고 엄격하다. 그에 따라 인신 구속이나 거액 배상 여부 등 법 적용 절차나 결과가 뒤바뀔 수 있기 때문이다. 판결문을 쓰는 판사들은 특히 더 그렇다. 그래서 전·현직 판사가 어떤 단어, 문구를 썼는지 보면 그의 속내와 상황, 가치 판단 기준까지 짐작할 수 있다.

양 전 대법원장은 얼마 전 기자회견을 열어 “법원행정처에서 뭔가 부적절한 행위가 있었다는 지적이 있었고, 그것이 사실이라면 막지 못한 책임이 있다”고 말했다. 핵심 메시지는 ‘나는 잘 모르겠다’이다. 법원행정처가 상고법원 도입에 걸림돌이 될 판사들 동향을 파악하고 판결 거래를 염두에 둔 문건을 작성한 것으로 드러났지만 애매한 용어로 피해간 것이다.

하지만 그의 후배 현직 판사들은 직위를 막론하고 분명한 용어를 썼다. 전국 법원장들은 간담회에서 ‘사법행정권 남용 행위가 사법에 대한 국민의 신뢰를 심각하게 훼손했다’고 밝혔다. 서울고법 부장판사들은 ‘사법행정권의 부적절한 행사가 사법부의 신뢰를 훼손했다’고 의결했다. 이들은 형사조치에 반대하면서도 이렇게 판단했다. 양 전 대법원장처럼 ‘사실이라면’이 아니라 법원행정처의 권한 남용을 사실로 단정했다. 전국법관회의에 참석한 115명의 판사도 마찬가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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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원행정처는 대법원장의 인사와 예산, 정책 집행을 보좌하고 실행하는 최측근 조직이다. 대법원장이 정점인 법원 서열 상부에 있다. 청와대 대통령비서실, 대기업 본사 경영기획실과 비슷한 위상이다. 이런 조직엔 힘이 쏠리기 마련이다. 그래서 법원행정처에 발령 난 판사들은 동료들로부터 “출세했다”는 얘기를 듣는다. 거기엔 대법원장의 이른바 ‘친위 그룹’에 속해 권력을 휘두르게 됐다는 인식이 깔려 있다.

양 전 대법원장은 바로 이런 자신의 ‘문고리 권력 조직’이 3년여간 한 일을 잘 모르겠다고 한 것이다. 법원행정처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 문건 파일 410개의 작성 시점은 2013년 말부터 2017년 초까지다.

사법은 권력이 아니라 봉사여야 한다. 하지만 대법원장과 법원행정처는 사법권력의 중추가 된 지 오래다. “사법부 독립”을 외치며 ‘삼권 분립’ 뒤에 숨어 견제를 피했다. 그 결과 양 전 대법원장과 그의 법원행정처는 검찰 수사를 받고 부패 권력이라는 오명을 뒤집어쓸지 모를 처지가 됐다.

‘오만도 비굴도 없는 의연한 자세.’ 가인 선생 생전 후배 법관들의 묘사다. 언제 다시 오만한 권력도 아닌, 권력 앞에 비굴하지도 않은 대법원장과 법원행정처를 보게 될까.
 
이명건 사회부장 gun43@donga.com
#사법#대법원#계구신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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