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의 향기]400일의 여정… 후지와라 신야의 마지막 방랑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5월 26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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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방랑/후지와라 신야 지음/이윤정 옮김/528쪽·2만8000원·작가정신

“집요하게 먹는다. 애무하듯 먹어치운다. 웃으면서 술병을 비우고, 음식을 씹고, 핥고, 위를 채우고, 장으로 흘려보내고, 또다시 먹는 일에 도전한다.”

터키 앙카라의 한 식당에는 손님 테이블의 접시 수를 늘린 만큼 식당 주인에게 리베이트를 받는 여성이 있다. 여성의 독특한 생계유지 방법도 신기하지만 거칠면서 흡인력 있는 묘사에 대한 감탄으로 숨이 턱턱 막힌다. 노골적이지만 감각적인, 살아 있음을 깨닫게 만드는 글이다.

이 책은 ‘인도방랑’, ‘티베트방랑’을 쓴 일본 사진작가이자 에세이스트인 저자의 방랑 3부작의 마지막이다. 터키 이스탄불에서 시작해 시리아, 인도, 홍콩, 한국, 일본에 이르는 400여 일의 여정을 기록한 이 책으로 1982년 제23회 마이니치예술상을 받았다.

눈을 뗄 수 없는 사진들은 대체로 무채색이지만 간혹 슬프게 강렬한 것들도 있다. 올리브에 절여진 피망, 고기를 주렁주렁 매단 길거리 정육점, 사창가의 여자들, 내장 기름과 배설물이 우러난 ‘이쉬켐베 초르바스(양 창자 수프)’…. 산양 두개골을 반으로 갈라 이빨과 눈알이 그대로 남아 있는 ‘코윤 바쉬(산양 머리 요리)’에서는 삶과 죽음이 한 그릇 요리 안에 뒤섞여 있는 것 같아 처연해진다.

서울 방문기도 흥미롭다. 저자는 “목구멍 깊은 곳에서 소리를 쥐어짜낸” 판소리 가수의 노래를 라디오에서 듣고 노점에서 순대와 간으로 배를 채운다. ‘노래의 광기와 피의 진동이 전해지는 영혼(소울)의 도시’라니, 익숙한 것도 왠지 낯설다.

삶을 초월한 듯한 여행기는 저자의 감정과 생각, 내면의 소리에 집중한 한 편의 소설 같다. 10년 넘게 지속된 여행으로 인간이 지겹고 무관심해지던 때 사람과 사귀며 “또다시 인간이 한없이 재미있어졌다”는 소회는 오랜 시간 생(生)에 대해 사유하고 탐구한 현자의 말 같다.

조윤경 기자 yunique@donga.com
#동양방랑#후지와라 신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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