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리도 밥약속도 사치일뿐” 삶속 기름기 쫙 뺀 ‘살코기 세대’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5월 26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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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기획]2030 새로운 라이프 스타일

《서울 소재 한 법학전문대학원에는 조금 남다른 밴드 동아리가 있다. 밴드지만 합주실이나 공연장에서는 모이지 않는다. 지난해 멤버 몇 명이 모여 한 차례 공연한 게 ‘신기한 일’로 회자될 정도다. 그 대신 한 학기에 한두 번 ‘코인 노래방’에 모여 노래를 부르며 스트레스를 푼다. 발라드, 록, 힙합… 공연을 준비하는 게 아니니 곡 선정도 자유롭다. 짧은 일탈은 길어야 두 시간. 치열한 경쟁 속에서 더 많은 시간을 투자할 여유는 없다. 아쉬움을 달래며 다시 열람실로 돌아온다.

어른들은 말한다. ‘요즘 것들’은 정도 낭만도 없다고. “젊은이들이 관태기(인간관계의 권태기)에 빠졌다”며 혀를 차기도 하고, “‘N포 세대’의 슬픈 현실”이라며 측은하게 여기기도 한다. 그런데 정작 당사자들은 무덤덤하다. 스스로 선택한 라이프스타일일 뿐이라 한다. 함께 밥 먹으면서 담소 나누는 시간도, ‘썸’ 타며 서로 알아가는 시간도 아까운 2030.

혹자는 이들을 두고 인생의 기름기를 쫙 뺀 ‘살코기 세대’라 부른다. 이들은 불필요한 인간관계는 최소화한다. 관계를 맺더라도 서로에게 필요한 것 이상은 주지도 않고 기대하지도 않는다. ‘살코기 세대’는 인생에 풍미를 더하는 마블링을 쫙 뺀 퍽퍽한 삶일까, 거추장스러운 기름기를 제거한 담백한 삶일까.》



○ 뒤풀이 없는 점심시간 동아리

올해 초 로스쿨에 진학한 정유민(가명·24·여) 씨는 입학 전 오리엔테이션에서 깜짝 놀랐다. 잘 시간도 줄여 가며 공부해야 할 만큼 학습량이 많다던 로스쿨 내에 서른 개나 되는 동아리가 운영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각종 학회와 스포츠 동아리까지 있었다. 대부분의 학생들이 서너 개씩 중복해서 동아리 활동을 한다는 학생회 선배의 설명이 믿기지 않았다.

학기가 시작되자 놀라움은 금방 해소됐다. 로스쿨 내 동아리는 운영 방식이 학부생 시절 동아리와는 달랐다. 대다수는 따로 시간을 내지 않고 점심시간을 활용해 모임을 가졌다. 그마저도 시간을 아끼기 위해 배달음식을 시켜 학교 내에서 해결할 때가 잦았다. 학회 활동은 번갈아 가며 발제문을 준비해 와 점심을 먹으며 함께 읽는 식으로 진행됐다. 몇몇 스포츠 동아리는 실제로 함께 모여 운동을 했지만 체력관리용으로 각자 운동을 하기 위해 모일 뿐이었다. 학부 시절처럼 으레 따르는 뒤풀이는 일절 없었다.

정 씨도 네 개의 동아리에 가입했다. 처음엔 이럴 거면 왜 굳이 동아리를 하나 싶었는데, 막상 해 보니 좋은 점이 더 많다고 했다. “같은 건물에서 공부하면서 매일같이 얼굴 보는 사람들인데, 이렇게 밥이라도 같이 먹지 않으면 인사조차 안 하게 돼 오히려 불편할 것 같았어요. 공부 시간을 많이 빼앗기는 것도 아니라 부담 없고요.” 정 씨는 다른 학교 로스쿨의 사정도 별반 다르지 않더라고 했다.

○ ‘썸’ 타는 건 시간 낭비일 뿐… ‘셀소’로 짝 찾는 청춘들

직장인 A 씨(33)는 최근 직장인 전용 익명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결혼을 전제로 만날 여성을 찾는다는 글을 올렸다. 자신의 신체조건은 물론이고 회사 내 직급과 연봉, 소유한 부동산까지 ‘스펙’을 아주 구체적으로 쓴 후 만나고 싶은 여성의 외모와 직업 조건, 성격까지 구체적으로 단서를 달았다. 셀프 소개팅, 이른바 ‘셀소’였다. 이 익명 SNS 페이지에는 하루에도 수십 건씩 ‘셀소’ 글이 올라온다.

A 씨는 서른 살이 되던 해부터 한 달에 한두 번씩 소개팅을 해 왔고, 몇 달씩 사귀어 보기도 했다. 그러나 결혼할 만하다고 느껴지는 대상은 찾지 못했다. “주선자에게는 원하는 여성상을 구체적으로 이야기하기가 껄끄럽잖아요. 상대가 마음에 안 들어도 주선자에 대한 예의상 몇 번 더 만나야 할 때도 있고요. 셀소 글을 올려 짝을 찾는 편이 훨씬 효율적이죠.” A 씨는 더 이상 불확실한 소개팅에 돈과 시간과 감정을 소모하고 싶지 않다고 했다.

온라인 친목 카페를 운영하는 김모 씨(34)는 2016년 자신의 카페에 ‘셀소 게시판’을 열었다. 600명이 넘는 회원이 김 씨의 셀소 게시판에 짝을 찾는 글을 올렸다. 김 씨가 다녀온 ‘셀소 커플’의 결혼식만 해도 열 번에 이른다. 김 씨는 “셀소로 결혼하는 커플들에게 물어보면 부모님에겐 ‘친구에게 소개받았다’고 한다더라. 아무래도 아직 부모님 세대들은 ‘셀소’를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고 했다.

○ ‘대체식’을 찾는 2030

플라스틱 병에 미숫가루처럼 고운 분말이 들어 있다. 찬물을 붓고 잘 흔들어 주기만 하면 한 끼 식사가 완성된다. 후루룩 마시는 데는 수십 초면 충분. 다 마시고 나면 빈 병은 재활용 쓰레기통에 ‘휙’ 버리면 그만이다. 편의점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대체식’이다.

회사원 박정은(가명·27·여) 씨는 대체식으로 점심식사를 대신하곤 한다. 한 주에 한두 번 대체식으로 점심을 해결한 후 회사 근처 서점에서 시간을 보내거나 모자란 잠을 보충하는 시간이 박 씨의 ‘소확행(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이다. 올해 초 직장을 그만둔 윤서영(가명·26·여) 씨도 저녁 식사로 대체식을 애용한다. 어리지 않은 나이에 취준생 신분으로 돌아와 공부만 하기에도 마음이 바쁜데 굳이 밥을 차려 먹는 게 번거로웠다. “집에서 분말에 물 타서 마시는 게 좀 웃기는 짓 같긴 하지만, 뭐 어때요? 이젠 라면 끓이는 것도 시간 낭비로 느껴져요.”

대체식 시장은 최근 2년 사이 급성장했다. 2015년 말 대체식 ‘랩노쉬’를 출시한 이그니스는 2017년 매출 50억 원을 기록했다. 전년 대비 3배 이상 증가한 수치다. 지난해 60억 원의 매출을 기록한 인테이크는 2018년 매출 목표를 200억 원으로 높여 잡았다. 이그니스 관계자는 “당초 체중 조절에 신경을 쓰는 2030 여성을 타깃으로 제품을 출시했으나, 식사를 간편하게 해결하고 다른 곳에 시간을 투자하고자 하는 2030 남녀 전반으로 폭을 넓혔다”고 밝혔다.

○ 밥터디 하는 청춘들

서울 소재 4년제 대학을 수료하고 공인회계사(CPA) 시험을 준비하는 백승호(가명·27) 씨는 석 달 전 학교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밥터디(밥+스터디)’를 구했다. 백 씨 또래의 고시생 네 명으로 구성된 이 모임은 점심, 저녁 시간에 모여 밥을 먹고 헤어진다. 식사 시간은 한 시간을 넘기지 않고, 식대는 각자 계산하는 게 규칙이다. 메뉴는 늘 구내식당. 도서관에서 가깝고 음식도 빨리 나와 좋다.

지난해 처음 시험 공부를 시작할 때 백 씨는 구내식당에서 혼자 끼니를 해결했다. 친구들과 밥을 먹으면 이야기가 길어지기도 하고 놀고 싶은 마음도 들어 자꾸 공부 시간을 빼앗겼기 때문이다. 그러나 혼자 밥을 먹다가 과 후배나 동아리 사람들을 자꾸 마주치다 보니 주위의 시선이 신경 쓰였다. “매번 약속을 잡아 밥을 먹는 건 너무 번거로워요. 친구 기분이나 상황도 맞춰 줘야 하고요. 후배들과 밥을 먹으면 제가 사야 하니 그것도 부담이었죠.” 그래서 백 씨는 밥터디를 꾸렸다.

밥터디라고 정말 아무 말 없이 밥만 먹는 건 아니다. 각자 사는 이야기, 공부하며 겪는 스트레스와 어려움을 털어놓기도 한다.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이니 직장에 다니는 친구들보다 공감도 잘된다. 그러나 ‘딱 거기까지’다. 전화번호는 교환하지 않고, 따로 만나거나 ‘개인 카톡’을 하는 건 금물이다. 각자 공부에 방해가 되지 않는 선에서 서로에게 필요한 감정적 지원을 주고받는 사이. 백 씨가 말하는 ‘쿨한 관계’다.

대학내일20대연구소가 2016년 전국 20대 남녀 643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20대의 79.9%가 혼자 보내는 시간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또 69.5%가 무교류 동호회, 밥터디 등 목적 지향적 모임에 참여할 의향이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구정우 성균관대 사회학과 교수는 “미래에 대한 불안 심리 때문에 2030의 상당수가 사람들과 관계 맺는 일 자체를 불편하고 거추장스러운 일로 여기게 되었다. 친밀한 관계를 유지해 나가는 데서 효용을 느끼지 못하게 되었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임명호 단국대 심리학과 교수는 “SNS와 함께 성장한 2030에겐 오프라인에서의 친밀한 관계는 더 이상 필수적인 것이 아니게 되었다”고 설명했다.

살코기 세대는 본인들을 불쌍하게 여기는 기성세대를 이해하기 힘들다고 했다. 박정은 씨는 “매일 회사 사람들과 같이 점심을 먹어야 한다는 건 고정관념일 뿐”이라고 했다. 박 씨는 다음 달부터 대체식으로 점심을 해결한 후 남는 시간에 필라테스를 배우러 다닐 계획이다.

백 씨도 CPA 시험에 합격할 때까지 밥터디를 계속할 것이라 밝혔다. “관계가 깊어지면 신경 쓸 게 너무 많아져요. 기분이 안 좋아 보이면 길게 얘기를 들어줘야 하고, ‘소주 한잔할까’ 했을 때 거절하기도 어려워지죠. ‘합격’이라는 목표가 확실한 지금은 인간관계 때문에 불필요한 시간을 뺏기고 싶지 않아요. 필요에 의해 윈윈 하는 관계인데, 문제 있나요?”
 
이지운 기자 easy@donga.com
#살코기 세대#n포 세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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