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근길 사회] “여기가 인도야 주차장이야” 보도를 질주하는 차량들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5월 17일 17시 2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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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가 인도야 주차장이야”

11일 서울 강동구 천호대로. 보도(步道)를 걷던 시민들 사이로 회색 승용차 한 대가 곡예하듯 지나갔다. 음식점 주차장에 자리가 보이지 않자 보도에 차량을 세우려는 것이다. 이곳은 10년 전 서울시가 지정한 530m 길이의 ‘디자인 서울거리’. 시민의 안전하고 편안한 보행을 위해 조성한 곳이다. 하지만 차량이 오가는 모습도 쉽게 볼 수 있다. 하루 수백 대가 병원과 음식점 등 보도 안쪽 점포를 가려고 보도를 침범한다. 승용차부터 소형트럭까지 다양하다.


● 보도 위에서만 매년 20명 가까이 숨져

보도는 보행자를 위한 공간이다. 도로교통법 2조에 ‘보행자가 통행할 수 있도록 한 도로의 부분’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대신 차량은 보도 안쪽을 오갈 때 횡단할 수 있게 하면서 일시정지 및 주변 확인을 의무화했다. 보행자가 우선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17일 삼성교통안전문화연구소에 따르면 2016년 보도 위에서 보행자와 차량 간 충돌사고가 925건 발생했다. 이로 인해 19명이 숨졌다. 2012년부터 5년 간 연평균 19명이 보도에서 차에 치여 목숨을 잃었고 1069명이 다쳤다.

특히 사고가 집중된 안전 사각지대가 있었다. 바로 ‘건축후퇴공간’이다. 건물을 새로 지을 때 보도와 건물 사이에 비워놓는 일정한 공간을 말한다. 현행 건축법은 보행 편의를 위해 이를 강제한다. 덕분에 보도가 넓어지는 효과가 있다. 하지만 상당수 건물에서 마치 전용 주차장으로 사용한다. 이 곳에 차량을 세워도 제재할 근거가 없다. 삼성교통안전문화연구소는 보도 위 교통사고 대부분이 건축후퇴공간 탓에 발생한 것으로 분석했다. 이곳을 오가는 차량 탓에 보행자 교통사고가 발생한다는 것이다.

9일 서울 강남구 강남대로의 한 자동차 판매대리점 앞. 이곳은 지하철 강남역 4번 출구와 중앙버스전용차로 정류소가 가까이 있어 보행자 통행량이 많다. 자동차 대리점이 들어선 건물 앞에도 ‘건축후퇴공간’이 있다. 하지만 어김없이 주차장으로 쓰이고 있었다. 건축후퇴공간과 보도 사이에는 플라스틱 차단봉(볼라드) 같은 시설물도 보이지 않았다.

이날도 빨간색 승용차 한 대가 건축후퇴공간에 주차 중이었다. 심지어 바로 앞 보도 위에도 검정색 승용차 한 대가 서 있었다. 이를 제한하는 안내판이나 직원의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보행자들은 불법 주차 차량을 피해 숨바꼭질 하듯 좁아진 보도를 오갔다. 회사원 황모 씨(29·여)는 “자동차 대리점이 생긴 뒤 보도 위 주차와 차량 통행이 늘어나 훨씬 위험해졌다”라고 말했다.

● 차량의 ‘보도 침범’ 제한 절실

과거 보도를 가로질러 이용할 점포는 음식점과 주유소 정도가 전부였다. 하지만 패스트푸드점과 커피전문점이 늘어나면서 승차형 구매매장(드라이브스루)이 급증하고 있다. 그만큼 보도를 침범하는 차량이 더 늘어날 수밖에 없다.

보도 위 보행자를 차량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방안 중 하나가 쇠나 플라스틱으로 만든 볼라드다. 하지만 볼라드를 어디에 어떻게 설치해야 할 지에 대한 구체적인 기준이 없다. 그러다보니 지방자치단체가 설치한 볼라드 중에는 차량 통행을 제대로 막지 못하거나 유모차·휠체어 이용자의 통행까지 가로막는 경우가 많다. 무리한 차량 운행으로 파손되는 볼라드도 증가하고 있다.

서울 25개 자치구에 따르면 볼라드 보수 규모가 매년 늘어나고 있다. 2015년 2969건에서 지난해 4202건으로 32.9%나 증가했다. 투입 예산도 5억9130만 원에서 7억8607만 원으로 26% 늘었다. 한 자치구 관계자는 “드라이브스루 매장 증가, 도심 주차공간 부족 등으로 보도 위 차량 통행이 늘어나면서 볼라드 파손도 증가하고 있다”고 말했다.

보도 위 차량 통행을 억제하려면 건축물 용도와 보도폭 등을 고려한 안전시설물 설치 기준 강화가 필요하다. 일본 지바현 이치하라(市原) 시는 보도 폭이 2.5m 이상일 때 무조건 볼라드를 설치해 보행자와 차량 동선을 구분하고 있다. 또 한국에서도 건축후퇴공간을 주차장으로 사용할 경우 해당 건물주에게 볼라드나 펜스 같은 안전시설 설치를 강제할 필요가 있다.

전제호 삼성교통안전문화연구소 책임연구원은 “보도 내 차량통행으로 인한 사고를 예방하기 위한 안전시설물 기준 강화가 필요하다. 보행자가 우선인 보도에서의 교통사고는 ‘12대 중과실’로 사고 운전자가 형사처벌된다는 점도 명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보도 위 교통사고 원인 ‘스몸비족’▼

보도 위 교통사고의 가장 큰 원인은 ‘막무가내 차량’이다. 그런데 최근 급증하는 원인은 바로 ‘스몸비족’이다. 스모비족은 스마트폰만 내려다보며 주위를 살피지 않고 걷는 보행자를 말한다.

17일 삼성교통안전문화연구소에 따르면 2014년부터 3년간 보행 중 ‘주의 분산’으로 인한 교통사고가 6340건에 달했다. 사상자는 6470명이었다. 각 손해보험사에 접수된 피해 규모다. 그중 1791명을 대상으로 분석한 결과 61.7%인 1105명이 보행 중 휴대전화를 사용하다 사고를 당했다. 12명은 목숨을 잃었다. 휴대전화를 이용하며 걸으면 전방 시야각이 좁아져 갑자기 보도로 진입한 차량 등을 제 때 피하기 어렵다.

휴대전화 사용량이 많은 젊은층의 피해가 컸다. 10대와 20대가 사상자의 53.8%를 차지했다. 또 휴대전화 사용 중 사고의 71%가 등교와 출근시간인 오전 8시와 9시 사이에 집중됐다. 연령대와 상관없이 보행과 차량 통행이 가장 많은 때다. 휴대전화를 이용해 신문기사를 읽거나 동영상을 보는 경우도 많다. 특히 휴대전화 화면을 주시하거나 조작하며 걷던 중 교통사고로 숨진 사람도 7명이었다.

특히 횡단보도에서는 보행 중 휴대전화 사용의 위험성이 높아졌다. 연구소가 지난해 11월 서울시내 횡단보도 4곳에서 횡단보도 보행자 9850명을 관찰한 결과 1996명(20.3%)가 주의분산 행동을 보였다. 그중 휴대전화 사용자가 1823명(91.3%)에 달했다. 전화 통화를 비롯해 음악을 듣거나 휴대전화로 인터넷을 검색하면서 걷는 것이다.

횡단보도를 걸으며 휴대전화를 이용하면 다른 보행자와 동선이 겹치면서 부딪히거나 심지어 차량과 충돌할 가능성도 높다. 멀쩡히 걸어다가 보행자끼리 충돌할 가능성은 17.1%, 차량은 20%였다. 횡단보도에서 휴대전화를 보며 걷는 보행자 5명 중 1명은 차량와 부딪힐 위험이 있다는 것이다.

가장 위험한 건 횡단보도를 건너기 직전이다. 횡단보도에서 휴대전화를 사용한 1823명 중 횡단 전에 차량이 정지선 앞에 완전히 멈췄는지 좌우를 확인한 인원은 277명(15.2%)에 불과했다. 나머지 84.8%는 주변 보행자의 움직임만 의식하면서 곧바로 횡단보도를 건넜다.

박가연 삼성교통안전문화연구소 책임연구원은 “보행 중에는 자신의 안전을 위해서라도 휴대전화 사용을 자제해야 한다. 특히 횡단보도를 건널 때는 휴대전화를 사용하지 않는 습관을 들이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공동기획 : 행정안전부 국토교통부 경찰청 한국교통안전공단 손해보험협회 한국교통연구원 삼성교통안전문화연구소 tbs교통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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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형석기자 skytree08@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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