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일의 갯마을 탐구]〈2〉한국은행보다 돈 많았던 연평도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5월 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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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일 국립민속박물관 학예연구사
김창일 국립민속박물관 학예연구사
흑산도로 유배된 정약전의 심정이 이랬을까? 지난해 1월 거친 물살을 가르는 여객선에 몸을 맡긴 필자의 마음은 복잡했다. 오랫동안 어촌에 살며 참여관찰 조사를 해왔지만 연평도를 향하는 마음은 남다를 수밖에.

연평도 긴작시 해안은 북한 석도와 불과 1.5km 떨어져 있다. 늘 일촉즉발의 긴장이 섬을 지배한다. 1999년 연평도 해상에서 6·25전쟁 이후 남북 간에 벌어진 첫 해전이 발생했고, 2002년 또다시 양측의 충돌이 일어났다. 2010년에는 북이 200여 발의 포격을 가해 섬이 쑥대밭이 됐다.

여객선에 오르니 승객의 절반 이상은 해병대 장병. 같은 해 10월까지 연평도에서 살며 조사할 생각을 하니 옆자리에 앉은 병사보다 비장한 심정이 들었다. ‘40대 중반에 다시 입대하는구나. 난 해병대도 아닌데…. 그래도 논산훈련소 조교 출신의 기개로 버텨보자.’ 실제 도착한 연평도는 섬 전체가 하나의 군사 요새였다. 주민의 절반은 군인과 그 가족들.

사실 연평도는 1968년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조기잡이로 돈이 넘쳐났다.

“연평도 어업조합 일일출납액이 한국은행 출납액보다 많았다.” “연평도 어업조합 전무를 하지 황해도 도지사 안 한다.” “연평도 물이 마르면 말랐지 내 주머니 돈이 마를까.”

연평도 노인들이 과거를 회상할 때 하는 말이다. 주민들은 “조기 한 바가지, 물 한 바가지”라는 말로 조기가 넘쳐나던 시절을 회상한다. 4, 5월이면 어장은 조기로 가득 찼고, 거대한 조기 떼의 ‘꾸욱꾸욱’ 하는 울음에 잠을 못 이룰 정도였다.

조기잡이 어선과 상선 간의 바다 위 직거래 장터인 파시(波市)가 형성됐다. 일제강점기 초기부터 시작된 조기 파시는 대표적으로 흑산도, 위도 등이 유명했으며 그중 최고는 연평도였다. 작은 섬에 선원 수만 명이 몰려와 숙박시설, 상점, 각종 유흥시설이 형성돼 파시촌이 매년 두 달간 만들어졌다. 파시가 열리면 10시간씩 배를 타고 총리가 왔고, 전국 씨름대회와 유명 가수 공연이 열렸다. ‘연평 바다로 돈 실러 가자’라는 당시 노래도 있다. 평생을 연평도에서 산 정 씨 할아버지(95)는 당시를 이렇게 묘사했다.

“어부는 조기 떼를 따라 연평도로 모이고, 철새들(접대부)은 어부 떼를 따라 연평도로 모였지. 파시 골목길에 비하면 지금 명동 거리는 거리도 아냐. 사람에 치여서 걷지를 못했어. 사흘 벌어서 한 달 먹고, 한 달 벌어서 1년을 먹었어.”

조기 떼를 따라 연평어장을 찾는 어선과 상선이 많게는 5000여 척, 동원된 선원이 연인원 9만 명에 이르렀다. 영원할 것만 같던 활황은 조기 어획량이 줄며 1968년 5월 26일 파시를 마지막으로 막을 내렸다.

다행히 1980년대 꽃게가 많이 잡히기 시작하면서 연평도는 꽃게잡이 섬으로 명성을 이어가고 있다. 남북한은 이번 정상회담에서 서해 북방한계선 일대를 평화수역으로 만들기로 합의했다. 남과 북의 어선들이 어우러져서 고기를 잡는 장면을 상상해 본다. 파도가 높게 치는 날은 북한 어선이 연평항으로 피항하고, 북의 선원들이 연평도 식당을 찾는 모습은 상상만으로도 즐겁다. 꽃게 파시가 열려 남북한 어민으로 북적이는 날이 오면 다시 연평도로 향하리라.
 
김창일 국립민속박물관 학예연구사
#연평도#해병대#평화수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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