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윤완준]대륙 인민들 숨통 터준 중국 여기자의 눈흘김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3월 2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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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완준 베이징 특파원
윤완준 베이징 특파원
사건은 13일 오전 터졌다. 중국 최대 정치행사인 양회(전국인민대표대회와 전국인민정치협상회의)가 열리던 베이징 인민대회당 1층. 장관들이 회의에 참석하기 직전 잠시 서서 기자들 질문에 답하는 ‘부장통로’ 행사가 열리고 있었다. 샤오야칭 국유자산감독관리위원회 주임이 들어섰다. 빨간색 정장의 중국인 여기자는 자신을 전미(全美)방송국 기자라고 밝혔다.

“올해는 개혁개방 40주년입니다. … 시진핑 국가주석은 일대일로를 주창해 주변 국가에 대한 투자를 강화하고 있습니다. … 국유기업 재산 유실을 막기 위해 어떤 감독 메커니즘을 내놓을 것인지 소개해주세요.”

평범한 질문이 다소 장황했다. 자신을 미국 방송국 기자라고 밝혀 놓고 “우리나라(중국)가 해외 개방을 더욱 확대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 여기자 바로 옆에 서 있던 파란색 정장의 중국 여기자가 불편한 표정을 짓고 미간을 찌푸리더니 급기야 빨간색 옷 여기자에게 눈을 흘기고 고개를 돌려버렸다.

상황이 완전히 통제된 채 진행되는 중국 기자회견장에서 거의 일어나지 않던 일인 데다 관영 중국중앙(CC)TV를 통해 중국 전역에 생중계되고 있었다. 곧 중국 누리꾼들이 난리가 났다.

파란 옷 기자가 흰자위를 번득이는 장면이 캡처돼 이모티콘으로 만들어져 중국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서 급속도로 확산됐다. “부탁할게, 입 좀 닫아줄래?” 등의 풍자적 글도 붙었다.

중국 누리꾼들은 파란색 옷 여기자가 상하이의 경제신문 소속인 량(梁)모 기자라는 걸 밝혀내고는 “평소 우리의 내심을 눈흘김으로 드러낸 것”이라며 응원했다. 두 여기자와 똑같은 색 옷을 입고 상황을 흉내 내는 동영상들까지 올라왔다. 전미방송국 기자에게는 가짜 외신 기자가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됐다. 양회 직전 중국의 외신 기자들은 중국 당국에 “실제로는 중국 매체인 (가짜) 외신 매체 기자를 등장시키지 말라”는 문제 제기를 한 터였다.


중국 공산당 기관지 런민일보의 자매지 환추시보 후시진 편집장도 이 소동에 가세했다. 이날 웨이보(중국판 트위터 격)에 글을 올려 “쓸데없이 장황하게 질문한 여기자에게 눈을 흘긴 기자가 화제가 됐다. 이 가십이 삭제되지 않고 인터넷에 남아 있기를 바란다. 당원 간부는 언제나 정치를 얘기하지만 일반 국민들은 이런 걸 좋아한다”고 지적했다.

하지만 중국 당국은 관련 뉴스와 동영상 검열에 나섰고 후 편집장의 글도 삭제됐다. 후 편집장은 삭제 사실을 알리며 “하나의 화제가 또 죽었다. 단지 눈을 흘겼을 뿐 아닌가”라고 꼬집었다.

후 편집장과 달리 중국 당국은 가십으로 넘기기 어려웠던 것 같다. 시 주석의 임기 제한을 폐지한 개헌에 비판이 나오자 양회 직전 부랴부랴 개헌 관련 보도는 물론이고 SNS에 올라온 글까지 검열, 통제한 중국이었다. 중국의 생방송 기자회견은 질문할 기자와 질문 내용까지 미리 당국과 맞춰 민감한 질문을 피하는 것이 공공연한 비밀이다. 그런 중국 당국에 이른바 ‘관제(官制) 질문’에 대한 불편한 감정을 외신 기자도 아닌, 중국 기자가 거침없이 드러낸 돌발 상황은 당국에 대한 심각한 도전으로 받아들여졌을 수 있다. 엄숙한 정치 행사에 풍자거리가 등장하는 걸 우려했을 수도 있다.

지금 중국은 시 주석에게 권력이 집중될수록 사회 통제와 검열도 그 어느 때보다 강화되고 있다. 잠시나마 눈 흘긴 여기자 사건으로 ‘양회를 즐겼던’ 중국 누리꾼들의 유희는 경직된 통제에서 숨 돌릴 틈을 달라는 중국 인민들의 외침이었을지 모른다.
 
윤완준 베이징 특파원 zeitung@donga.com
#전국인민대표대회#전국인민정치협상회의#시진핑 국가주석#환추시보 후시진 편집장#관제 질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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