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 ‘미투’ 폭로 이어 ‘위투’ 제안에도 잠잠, 현지 언론 보도 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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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8년 3월 19일 16시 4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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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이토 시오리 씨가 지난해 10월 발매한 책 ‘블랙박스’
사진=이토 시오리 씨가 지난해 10월 발매한 책 ‘블랙박스’
“‘#MeToo(미투·나도 당했다)’는 일본에서 큰 운동으로 발전하지 않는다. 피해 여성들이 사회의 손가락질을 두려워해 자기 경험을 공유하기를 꺼려하기 때문이다.”

일본판 ‘미투’ 운동을 촉발시켰던 일본의 프리랜서 저널리스트 이토 시오리 씨(28·여)의 말이다. 현지 일간지 마이니치신문은 최근 이토 씨의 말을 인용해 전 세계적인 미투 운동이 일본에서 만큼은 잠잠한 이유를 짚었다.

매체에 따르면 이토 씨는 지난 16일(한국시간) 미국 뉴욕 유엔 본부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일본에서는 성폭력 피해를 고발한 여성에 대한 사회적 반발이 가혹하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미투’ 운동 대신 ‘WeToo(위투·우리도 행동해야 한다)’ 운동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위투’는 이탈리아 출신 배우 겸 감독 아시아 아르젠토가 최근 ‘세계 여성의 날’을 기념해 제안한 운동이다. 그는 세계를 휩쓴 ‘미투’ 운동을 촉발한 할리우드 거물 제작자 하비 와인스틴 사건의 최초 폭로자 중 한 명이기도 하다.

그러나 아시아 아르젠토에 이어 이토 씨의 ‘위투’ 발언에도 일본은 조용한 분위기다. 19일 오후 기준으로 ‘위투’와 관련 아사히신문, 버즈피드 등 일부 언론 보도를 찾아볼 수 있기는 하지만, 관련 기사 댓글란이나 소셜미디어는 잠잠하다.

이토 씨는 지난해 5월 성폭행을 당한 사실을 실명으로 폭로하면서 일본에 ‘미투’라는 화두를 던진 인물이다. 이토 씨는 2015년 4월 취업 상담을 위해 야마구치 노리유키 당시 TBS 워싱턴 지국장을 만났다가 성폭행을 당했다며 경찰에 신고했다. 그러나 경찰은 조사 과정에서 이토 씨에게 “처녀냐”고 묻거나 당시 상황을 직접 재현하라고 강요했다. 이후 야마구치 지국장을 불기소 처분했다. 이에 이토 씨는 일본 매체 버즈피드에 피해사실을 폭로하고 기자회견을 열었다. 현재 야마구치 전 지국장을 상대로 1000만 엔의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해 재판이 진행 중이다. 지난해 10월에는 사건 당시 정황을 담고 일본 사법과 언론의 ‘벽’에 대해 비판한 ‘블랙박스’라는 책을 냈다.

이토 씨를 응원한다는 이들이 있었지만, 싸늘한 시선도 따라왔다. 이토 씨가 기자회견에서 입었던 옷까지 도마에 올랐다. 당시 이토 씨가 입었던 셔츠의 단추를 제대로 잠그지 않았다는 손가락질부터 “유명해지고 싶어서 유명 인물의 이름을 팔았다”는 비난이 잇따랐다. 이토 씨의 책 ‘블랙박스’도 마찬가지다. 일본 최대 인터넷 쇼핑몰 사이트 아마존 재팬의 리뷰 페이지를 보면, “자신의 이름을 팔기 위한 소설. 픽션으로 보면 재미있다” “이미 검찰에서 불기소 처분한 특정 개인을 강간범으로 몰아가는 행위는 ‘린치’나 다름없다”는 이들이 있다.

물론 “얼굴과 실명을 공개하고 피해 사실을 세상에 호소하는 시오리 씨의 용기와 정의감에 감동해 책을 샀다. 나도 옛날에 비슷한 경험을 했다. 책을 사고 다시 그 기억이 살아날까 무서워 잠시 읽을 수 없었지만 결국 책을 열었다” “목소리를 높여 준 것에 감사한다. 이 문제가 국제적으로 논의되고 일본이 바뀌게 되는 날을 기대한다”는 등 응원의 목소리도 있다.

일본의 작가이자 파워 블로거 여성 ‘하추(본명 이토 하루카·31)’ 씨는 지난해 12월 언론을 통해 약 8년 전 광고 대기업 덴쓰에서 일할 당시 선배에게 성희롱을 당했다고 털어놨다. 그는 앞서 이토 씨의 폭로에 용기를 얻었다고 밝혔다. 트위터 등 소셜미디어를 중심으로 ‘미투’ 운동이 확산하는 기미를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곧 “굳이 자신과 상대방의 실명까지 공개할 필요가 있느냐” “다니던 회사 이름에 먹칠을 한다” “회사에 대한 개인적인 보복 아닌가”는 비난이 일며 의혹의 눈길이 쏠렸다. 여기에 해당 사건과 관련 없는 하추 씨의 과거 발언이 논란으로 떠오르며 그의 폭로는 묻히다시피 했다. 소셜미디어의 ‘미투’ 운동도 곧 잠잠해졌다.

그러나 하추 씨의 폭로에 힘입어 입을 연 연예계 여성도 있다. 앞서 이토 시오리 씨가 피해를 폭로했던 매체 버즈피드는 최근 그라비아(일본에서 산업화된 수영복 화보나 영상물) 여배우로 10년을 활동해 온 이시카와 유미 씨의 고백을 다뤘다. 이시카와 씨는 앞서 자신의 소셜미디어를 통해 일을 반복할 때마다 노출을 늘려야 했고, 이를 거부하면 “일이 끊길 것”이라며 협박을 받았다고 주장했다. 또 회식 자리에서 노골적인 표현으로 성희롱을 당하는 일이 빈번했다며 성행위 요구를 받기도 했다고 털어놨다. 또 한 방송국 프로듀서와 다른 한 남성이 자신과 술을 마시다가 당연하다는 듯이 호텔로 끌고갔다며 당시 두려운 마음이 앞서 도망칠 수 없었다고 했다.

매체에 따르면 이시카와 씨가 목소리를 낸 뒤에도 일본 연예계는 조용했다. 이에 대해 이시카와 씨는 “목소리를 낸 뒤에도 업계 사람들 사이에서 반응은 거의 없었다. ‘뭘 저리 시끄럽게 떠드나’ 정도로 생각했을 지도 모른다”고 토로했다. 그러면서 “소리를 내고 싶지 않은 사람은 내지 않아도 된다. 그러나 ‘싫다’는 생각이 들면 소리를 높여 외쳐도 된다고 전하고 싶다”며 “용기가 필요한 일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곳(연예계)에서만 살아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세상은 그곳만이 아니라고 말해주고 싶다”고 강조했다.

한편 니혼게이자이신문이 지난해 12월 20~50대 여성 20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성희롱’ ‘파와하라(상사가 직위를 이용해 부하를 괴롭힘)’ ‘마타하라(임신·출산에 따른 괴롭힘)’ 중 하나라도 피해를 입은 적이 있는 여성은 21%에 달한다. 그러나 이에 대해 직접적으로 입을 열어 큰 목소리를 내는 일본 여성은 거의 눈에 띄지 않는 상황이다.

이와 관련해 여성 인권 신장·환경 보호 캠페인을 펼쳐 온 한 시민단체 대표 가마타 가노코 씨는 게이자이우먼온라인을 통해 “일본에서는 조직 내 계층 구조에서 인간관계를 형성하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한다. 개인의 생각을 존중하기보다 ‘나는 이런 입장이기 때문에 이대로 좋다’ ‘이런 입장이기 때문에 이렇게 해야 한다’는 식으로 인간관계를 만든다”며 “권력을 가진 사람은 그것이 폭력이라고 자각하지도 못한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일본에서 ‘강간’의 정의는 국제적으로 봐도 매우 좁으며, 외국에서는 지위 상하 관계를 이용해 성행위를 하면 범죄인 경우가 많지만 일본은 폭행이나 협박이 없을 경우 범죄가 성립되지 않는다는 것은 시민단체 활동을 통해 알게 된 사실”이라며 관련 법 개선을 촉구했다.

박예슬 동아닷컴 기자 yspar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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