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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성하 기자의 서울과 평양사이]고은과 겨레말큰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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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성하 기자의 서울과 평양사이]고은과 겨레말큰사전

주성하기자 입력 2018-03-08 03:00수정 2018-03-09 0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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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자주 평화통일을 위한 8·15 대축전’ 일환으로 열린 ‘겨레말큰사전 남북 공동편찬사업 보고회의’에서 고은 당시 사전편찬위 남측 상임의장이 연설하고 있다. 동아일보DB

주성하 기자
나쁜 손버릇이 미투(#MeToo)로 고발되기 훨씬 전부터 난 고은을 “양심 없다”고 욕했다.

김정일 앞에선 감격에 겨워 시를 낭송하고, 북한 인권은 “가보지 않아 모른다”고 대답한 이중성도 싫었지만, 진짜 이유는 그가 매달려온 남북 공동 국어사전인 ‘겨레말큰사전’ 때문이다.

고은은 2006년 1월 겨레말큰사전 남북공동편찬사업회(이하 사업회) 초대 이사장이 돼 12년 넘게 자리를 지켜왔다.

나는 겨레말큰사전을 생각하면 왜 막대한 예산을 쓰며, 왜 지금 꼭 만들어야 하는지, 누굴 위해서 만드는지를 납득할 수 없었다. 2011년 1월에도 이 사전을 비판했었기에 ‘언어학 문외한’이란 비난도, ‘반통일론자’로 욕먹을 수 있다는 것도 안다.

그럼에도 할 말은 해야겠다. 지금까지 이 사전 만든다며 300억 원 넘는 세금이 들어갔다. 올해도 33억 원이 책정됐다. 고은은 2009년 11월에 사전편찬 작업의 50%를 진척했다고 말했다. 통일부는 지난해 3월까지 진척도가 75%라고 했다. 예산이 투입돼 3년여 만에 50%를 한 작업을 7년이 넘도록 고작 25% 더 했다는 얘기다.

과거 정부의 대북정책 탓에 북한 학자를 6년이나 만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해명할 순 있다. 그런데 진척도는 5분의 1 이하로 떨어졌는데도 사업회 예산 중 인건비 액수는 오히려 계속 늘어나 현재 15억 원에 육박한다.

대체 뭘 하고 있는지 궁금해 사업회 홈페이지를 보니 북한 어느 옛 소설에서 찾아낸 ‘합태’ ‘허두하다’ ‘갈마붙다’ 등을 ‘새로 찾은 겨레말’이라고 올려놨다. 이 용어들은 올림말 44만 개가 수록된 북한 ‘조선말대사전’에도 없다. 우리가 왜 북한조차 인정하지 않는 용어까지 세금을 들여 찾아줘야 하는지를 이해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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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업회는 지금까지 30명 미만이 일하는 사무실 유지비와 공과금으로 50억 원 넘는 세금을 썼다. 하는 일 거의 없는 고은의 번듯한 이사장실 유지비에도 세금이 꼬박꼬박 들어가는 것을 보며 “저 사람은 명성과 달리 참 양심이 없다”고 생각했다. “남북 공동 국어사전이란 업적을 만들어 노벨 문학상 타려는 욕심에 수백억 원의 세금이 탕진되는 것 아니냐”는 생각마저 들곤 했다.

2013년까지 만들겠다던 사전은 2019년까지 사업이 연장됐다. 그런데 내년까지 끝날 확률도 희박하니 또 사업 기간 연장하고 매년 30억 원 넘게 정부 예산을 달라고 할 것이다. 도대체 이 사전은 몇백억 원짜리가 될지 가늠이 안 된다.

난 4년 전쯤 ‘남북언어비교용어집’을 직접 만들어 본 적이 있다. 언어 적용에 어려움을 겪는 탈북민을 위해 쉬는 날에 짬짬이 국어사전 6개를 다 보고 남북이 서로 다른 용어를 골라냈는데, 혼자서도 딱 3개월밖에 걸리지 않았다.

직접 해보니 순수 우리말은 남북의 차이를 무시해도 될 정도라 훗날 남북통일이 돼도 언어 소통에 별문제가 없겠단 결론을 내렸다. 내 경험상으로도 북에 있을 때 몰래 구한 남쪽 엣센스 영어사전으로 공부했지만 이해 안 되는 것이 거의 없었다. 북한 사람이 남쪽 말을 잘 알아듣지 못하는 원인의 99%는 남용되는 외래어 때문이다.

남북 공동 사전이 꼭 필요하다고 생각했다면 난 이 글을 쓰지도 않았다. 난 누구를 위해 지금 이렇게 비싼 사전을 만드는지를 도저히 모르겠다.

사업회는 사전 발간 취지의 첫 설명으로 “남북의 겨레가 함께 볼 최초의 사전”이라고 했다. 아니, 한국 출판물을 보면 잡혀가는 북한 사람들에게 이 사전이 필요한 것인가. 아니면 이 비싼 사전이 지금 한국의 누구에게, 도대체 몇 명에게 필요한 것인가.

모르는 북한말이 있으면 ‘조선말대사전’에서 찾고, 한국어는 ‘표준국어대사전’에서 찾으면 된다. 뭐가 그리 불편해 지금 수백억 원 들여 꼭 합쳐야 한단 말인가. 어차피 지금은 합의 안 되는 것들이 너무 많아 어떻게 만들어도 반쪽짜리 사전밖에 안 된다. 남북이 백날 마주 앉아도 이설주라고 쓸지, 리설주라고 쓸지조차 합의할 수 없는 게 현실이다.

언어의 통일은 통일 이후에야 가능하다. 통일이 한국 주도로 이뤄진다면 서울말이 표준어가 되고, 북한말은 지역어가 된다. 북한 사람은 탈북민처럼 한국말을 빨리 배우기 위해 애를 쓰겠지만, 서울 아이들이 학교에서 “러시아는 북한말로 로씨야입니다”라고 배울 일은 없다는 뜻이다. 또 2400만 명의 표준어보단 5000만 명이 사용하는 언어가 표준어가 되는 게 순리다.

제주도말부터 함경도말까지 다 아우르는 진정한 통일 겨레말사전은 통일 후 표준어와 지역어의 지위가 분명해진 뒤에야 만들 수 있다. 또 통일 이후 남북 학자 수십 명이 함께 모여 작업하면 빨리, 매우 값싸게, 훨씬 정확하게 만들 수 있다. 지금처럼 만날 때마다 북한에 15만 달러어치씩 주면서도 1년에 고작 4번도 만나지 못해 애쓸 필요도 없다.

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고은#겨레말큰사전#미투#이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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