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룸/박선희]우리들의 일그러진 ‘선생님’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2월 2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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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선희 문화부 기자
박선희 문화부 기자
한국 문화계를 뒤흔드는 미투 고백 속에서 계속 눈에 띄는 단어가 있다. ‘선생님’이다. 이윤택 전 연희단거리패 예술감독에게 당한 성폭력을 털어놓으며 피해자들은 한결같이 상대를 향해 ‘선생님’이란 존칭을 붙였다. “선생님께선 전혀 변함이 없으셨다”거나 “선생님은 네가 뭔데 판단하느냐고 분노하셨다”라는 식으로 회고한다.

폭로된 내용은 선생님이란 단어와는 어떤 식으로도 어울리지 않는다. 그런데 위기에 몰린 이 전 감독이 기자회견 리허설까지 하며 은폐를 모의한 새로운 사실이 폭로될 때도 ‘선생님’이라는 단어는 어김없이 등장했다.

“도저히 인간으로서 할 수 없는 일들이었습니다. 선생님은… 괴물이었습니다.”

거장에서 괴물이 된 그 순간까지도, 어찌 됐든 그는 ‘선생님’이었다.

역설적으로 이 시점에 계속 등장하는 ‘선생님’이란 단어는 폐쇄된 문화계 내부에 그간 얼마나 많은 부조리가 있어왔을지를 짐작하게 해주는 단서가 된다. 여전히 ‘선생님’이라 불리는 그에게 맞서기 위해 피해자들은 얼마나 큰 용기를 내야 했을까.

문화계에서 쓰는 ‘선생님’이란 호칭은 조금 특수하다. 감독이나 연출가 같은 객관적 직함과는 달리 한국식 친밀감과 존경, 호의나 유대감까지 내포한다. 이 때문에 ‘선생님’은 거장을 예의 바르면서도 친근감 있게 대하는 마법의 호칭이기도 하다.

출판문학 담당 기자로 일하게 되면서 가장 먼저 배웠던 것도 이 호칭이었다. 문단에서는 정작 ‘작가님’이라는 말은 거의 쓰지 않는다. ‘선생님’이란 말이 입에 친근하게 붙어 있을수록 인사이더(insider)다. 같은 맥락에서 많은 사람들의 ‘선생님’일수록 거장이다. 노벨 문학상 후보에서 성추행 가해자가 돼 버린 고은 시인 역시 모두에게 ‘선생님’으로 불리던 이들 중 하나였다.

미투 운동의 진원지는 미국 할리우드다. 거물 제작자 하비 와인스틴에 의해 수십 년간 상습적으로 이뤄진 성폭력이 유명 여배우들의 증언으로 폭로되며 본격화됐다. 하지만 앤젤리나 졸리, 우마 서먼 같은 유명 배우조차 오랫동안 침묵해야 했을 만큼 그들의 권위는 막강했다. 주로 힘없고 백 없는 신인들이나 편집자들을 대상으로 저질러졌던 한국의 미투 사건이 공론화되기 어려웠던 이유는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여기에 한국은 호칭까지 공범이 됐다. 피해자들은 ‘선생님’ 앞에서 무력했을 뿐 아니라 ‘같은 선생님’을 모시는 동료들 사이에서도 무력했다. 뻔히 보이지만 투명인간이 됐고 묵인과 방조가 이뤄졌다. 우리 문화계의 성폭력이 단지 거장 몇 사람의 문제가 아니라 내부의 권력구조와 깊숙이 연관돼 있는 이유다.

이토록 ‘일그러진 선생님들’은 어떤 비호 속에서 괴물처럼 커지고 있었던 것일까.

미투 폭로 후 주요 연극단체는 이 전 감독을 바로 제명시켰다. 고 시인과 관련된 전시공간이나 문학관 건립을 추진하던 지자체들도 흔적을 지우기 위해 고심 중이다. 피해자만 다시 상처받고 흐지부지됐던 전철을 밟지 않으려면 제대로 된 후속처리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하지만 지금의 혼란이 문화계 판을 새로 짜는 자성과 혁신의 출발이 되려면 저 질문에 대한 답 역시 함께 찾아봐야 할 것이다.
 
박선희 문화부 기자 teller@donga.com
#문화계 미투 고백#이윤택 전 연희단거리패 예술감독#선생님 호칭#제작자 하비 와인스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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