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하준경]서울에서 멀어지면 불안한 나라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2월 20일 03시 00분


코멘트

2000만 명 사는 한국 수도권, 선진국에 비해 지나치게 많아
중앙집권 강한 나라일수록 중심지 특권 많아지고 수도 집중 현상 심해져
국토 균형발전 이루려면 각 지역 대표성 더 커져야

하준경 한양대 경제학부 교수
하준경 한양대 경제학부 교수
최근 극심해진 집값 양극화의 근저에는 수도권 인구 집중과 지방 축소라는 큰 흐름이 자리하고 있다. 서울 경기 인천의 인구 비중은 30년 전에 40%를 돌파한 후 계속 올라 49.6%가 됐다. 생산연령인구만 보면 이미 10년 전에 50%를 넘었다. 지역 균형발전보다 수도권 국제경쟁력을 외치는 목소리가 더 크게 들리는 것도 수도권이 과반에 근접한 현실과 무관치 않다.

그럼 거대 수도권이 혁신과 경쟁력의 필수조건일까. 세계의 거대 도시권들을 보면, 최상위는 아시아 및 중남미 개발도상국에 있다. 일본이 수도권 인구 3780만 명으로 1등이면서 예외적으로 선진국이지만 도쿄의 인구 밀도는 서울보다 낮다. 한국 수도권은 인도네시아 인도 중국 파키스탄 멕시코의 2000만 명 초과 도시권과 비슷한 규모다. 하지만 나라 인구 대비 비중에선 서울권이 이 모두를 압도한다. 반면 미국 유럽의 혁신 중심지는 인구의 절대 수나 집중도 모두 상위권에 못 든다. 미국 샌프란시스코와 보스턴 권역은 각각 480만 명이고, 유럽의 광역 수도권도 영국 1400만 명, 프랑스 1200만 명, 독일 600만 명, 네덜란드 710만 명 수준이다. 혁신 중심지의 지식 공유 효과는 소프트웨어 산업의 경우 반경 1.6km를 넘으면 90%가 사라지고, 광고 산업의 경우엔 반경 750m가 넘으면 완전히 사라진다. 혁신 도시가 거대 도시일 필요는 없다.

미국 하버드대 에드워드 글레이저 교수 등에 따르면 개도국 수도가 거대 도시가 되는 것은 정치적 요인 때문이다. 개도국에선 권력자와 가까운 곳에 위치해야 각종 이권을 얻기 쉽다. 권력자와 공간적 거리가 가까우면 뇌물 공여 등 불법 행위를 숨기기 쉽고 위협을 가하기도 쉬우며, 정보 접근성이 높고 비공식적 소통도 용이하다. 이 같은 수도의 이점 때문에 특권을 추구하는 이들이 수도에 모인다. 이들의 영향력이 커지면서 정부는 수도에 자원을 집중시킨다. 수도에 모인 특권과 자원은 지방 인구를 수도로 끌어들이는 구심력이 된다. 수도는 세금과 재정을 통해서든 인구 흡수와 땅값 상승을 통해서든 지방의 부를 빨아들여 중심부에 재분배하는데, 이런 경향은 중심지 실력자들이 정부를 좌우하거나 각종 진입장벽 등 정부가 관리하는 특권이 많거나 중앙집권적 속성이 강할수록 커진다.

한국도 크게 다르지 않다. 법·정책을 만들고 집행하는 사람들과 그 대상이 되는 사람들이 대개 공간적 근접성을 유지하며 서로 돕는다. 규제자는 퇴직 후 피규제자가 만들어주는 자리에 재취업을 하고 피규제자는 각종 특혜를 제공받는 암묵적 거래가 많은 분야에서 이뤄진다. 자녀들 취업 혜택이나 지원금도 동원된다. 피규제자가 규제자 근처에 있어야 이 모든 거래가 수월하니 기업들이 수도에 모이고 일자리도 수도에 생긴다. 집적에 따른 효율보다 과밀로 인한 비용이 더 커져도 정치와 경제의 공간적 융합은 계속된다. 교육과 취업에도 중심지 특권이 생겨난다. 언제부턴가 수도로부터의 거리를 갖고 대학 수준을 따지는 나라가 됐다. 지방에 직장을 둔 지식인·관료도 집은 서울에 있어야 안심이 되고, 지방 부자는 서울 아파트를 사두지 않으면 불안하다. 앞날이 불확실할 땐 힘 있는 사람들과 같은 동네 주민이 되는 게 안전하다고 믿는다.

헌법자문특위에서 개헌안에 지방분권 조항을 넣는다고 한다. 수도권은 고비용에 시달리고 지방은 박탈감과 소멸 불안에 시달리는 현실을 타개하려면 글레이저의 분석이 시사하는 것처럼 정치적 의사결정 과정을 고쳐야 한다. 중심지의 시각이 점점 더 많이 반영될 수밖에 없는 의사결정 시스템으로는 인구 집중과 자원 집중이 상승 작용을 일으켜 모두가 거대한 블랙홀에 빠져드는 것을 막을 길이 없다. 지방자치단체에 일부 자치권을 더 주거나 길을 더 닦아주는 것만으로는 블랙홀 중심부의 특권을 건드릴 수 없다.

규제자가 주변 사람들과 알게 모르게 주고받는 특혜들을 근절하고, 교육·의료 등 핵심 인프라도 고르게 발전시키려면 근본적으로 정치적 의사결정 과정에서 각 지역의 대표성을 높여 독점적 특권이 한곳에서 확대재생산되는 것을 견제하게 해야 한다. 이를 위해 미국 의회의 상원처럼 각 지역이 인구수와 무관하게 동등한 대표권을 갖는 대의기구를 만드는 것도 검토해볼 만하다. 많은 선진국이 지역 대표성을 위한 장치를 운용한다. 지역 이기주의가 걱정되겠지만 지역 문제를 지금보다 투명하게 논의하고 명시적으로 조율하는 제도를 갖추는 게 수도권과 지방의 공멸을 막는 데 더 효과적이지 않을까.

하준경 한양대 경제학부 교수
#집값 양극화#수도권 인구 집중#지방 축소#지방분권 조항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