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잡史]10여개 도구로 독살여부 가린 조선판 CSI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1월 2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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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시 전문가 ‘오작인’

조선 말기 풍속화가 기산 김준근의 ‘살인에 검시하는 모양’. 오작인이 변사체를 닦고 만지며 검시를 하고 있다. 독일 함부르크민족학박물관에 소장돼 있다. 한국학중앙연구원 제공
조선 말기 풍속화가 기산 김준근의 ‘살인에 검시하는 모양’. 오작인이 변사체를 닦고 만지며 검시를 하고 있다. 독일 함부르크민족학박물관에 소장돼 있다. 한국학중앙연구원 제공
“관원이 율관·의관과 함께 한성부 서리, 하인 및 오작인(오作人) 등을 거느리고 시체를 안치해 둔 곳에 도착해 먼저 공초를 받는다. 그 다음에 검시(檢屍·시체를 조사함)를 실시한다. 날이 저물 경우 이튿날 아침까지 기다렸다가 검시한다.”―‘심리록(審理錄)’에서

조선시대 살인 사건이 벌어지면 고을 사또가 검시관을 맡았지만 손수 검시를 하지는 않았다. 변사체를 만지는 험한 일이었고, 시체의 상흔을 판독하는 전문지식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검시는 오작인이라 불린 전문가가 했다. 오작인은 법의학서 ‘무원록(無寃錄)’ 등에 근거해 사인을 찾았다. ‘무원록’은 중국 원나라 책이지만 조선 실정에 맞게 세종 때 ‘신주 무원록’, 영·정조 때 ‘증수 무원록’으로 개정증보를 거듭했다. 19세기에 이르면 검시와 문서 작성법을 정리한 ‘검고(檢考)’가 간행되기도 했다.

검시는 기본이 두 번이며, 세 번 하기도 했다. 이미 매장한 시신을 파내 다시 검시하는 굴검(掘檢)을 하기도 했다. 검시마다 다른 관료와 오작인이 함께 진행해 객관성을 확보했다. 변사체라도 시신을 훼손하고 칼을 대는 일은 금기였다. 부검을 할 수 없었던 까닭에 오작인은 변사체 상태나 상흔을 꼼꼼히 관찰했으며, 사인을 파악하기 위해 다양한 법물(法物·조사도구)도 이용했다.

법물은 10여 가지였다. 식초는 흉기에 뿌려 핏자국을 찾는 데 썼고, 술지게미로 상처 부위를 닦아 상흔을 선명하게 드러냈다. 은비녀를 항문이나 입에 넣어 색이 변하는지 살폈고, 흰 종이를 눈 코 입에 붙여 독기가 묻어나오는지 보며 독살 여부를 가렸다. 단목탕(檀木湯·향나무 끓인 물)은 시신을 닦는 데, 삽주(국화과의 풀) 뿌리는 태워서 악취를 없애는 데 썼다.

검시는 사건을 해결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1904년 5월 경상도 문경에 살던 양반 안재찬은 아내 황씨가 목을 매 자살했다고 관아에 신고했다. 오작인 김일남이 문경군수와 검시를 했다. 시체는 은비녀를 입에 넣었을 때 색이 변하지는 않았으나 곳곳에 구타한 상흔이 뚜렷했다. 또 뒷목에 끈으로 조른 흔적이 있었다. 검시 결과를 토대로 황씨의 죽음은 자살이 아닌 교살(絞殺)로 판정됐다.

사건의 내막은 이랬다. 같은 마을에 살던 천민 정이문이 황씨를 겁탈하려다가 도주했다. 남편 안재찬은 정이문을 놓치자 대신 그의 할아버지를 잡아 구타했다. 할아버지는 황씨와 정이문이 오랫동안 내연관계였다고 했다. 이에 안재찬은 격분해 앞뒤 가리지 않고 아내를 구타하고 올가미로 목을 졸라 살해했다.

오작인은 연고 없는 시신을 처리하는 일도 맡았기에 훼손된 시체가 나오면 오작인이 잘라 팔았다는 낭설이 돌기도 했다. 오작인은 변사체를 만진다는 이유로 천시받았지만, 그들 덕분에 말을 할 수 없는 시체는 억울함을 씻을 수 있었다.
 
홍현성 한국학중앙연구원 전임연구원
#오작인#조선 말기 풍속화가#살인에 검시하는 모양#기산 김준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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