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30m 성벽에 갇힌 ‘마지막 한달’…윤봉길 오사카형무소 사진 첫 공개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12월 1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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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봉길 의사 19일 순국 85주기

그곳은 조선을 침략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본거지였다. 30m 높이의 깎아지른 오사카(大阪)성 성벽 아래로 해자(垓字)가 둘러싸고 있어 마치 ‘앨커트래즈 감옥’처럼 고립된 곳. 앞쪽엔 일본 육군 4사단 사령부가 지척에 있고, 뒤쪽 해자 건너편으로 헌병대와 포병대, 사격장 등 군 시설이 빼곡히 들어섰다. 바로 이곳이 윤봉길 의사(1908∼1932)가 순국 직전 마지막 한 달을 보낸 형무소였다.

1932년 11, 12월 윤 의사가 갇혔던 일본 오사카 육군 위수형무소를 촬영한 항공사진과 실측도가 일본 현지에서 최근 발견됐다. 오사카 형무소의 위치는 대략 알려졌으나 이를 촬영한 사진은 처음 입수됐다. 형무소의 내부 건물 배치와 면적을 표시한 실측도 역시 처음 공개되는 것이다. 12월 19일은 윤 의사가 일본 가나자와(金澤) 육군 작업장에서 순국한 지 85주기가 되는 날이다.
 


▼해자로 둘러싸인 형무소… 앞에는 軍사령부, 뒤에는 헌병대▼

윤봉길 의사 ‘마지막 한달’ 보낸 위수형무소 사진-실측도 발견


일본 오사카 육군 위수형무소(가운데 건물들)를 표기한 조감도(위쪽 사진). 윤봉길 의사가 처형 직전 13시간가량 머문 가나자와 일본군 9사단 구금소 터(아래쪽)에는 화장실이 들어서 있다. 오사카 중앙도서관 제공
일본 오사카 육군 위수형무소(가운데 건물들)를 표기한 조감도(위쪽 사진). 윤봉길 의사가 처형 직전 13시간가량 머문 가나자와 일본군 9사단 구금소 터(아래쪽)에는 화장실이 들어서 있다. 오사카 중앙도서관 제공
마치 절벽 같은 오사카(大阪)성 성벽을 내려다보며 윤봉길 의사는 어떤 생각을 품었을까. 윤 의사가 수감된 감방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지은 덴슈카쿠(天守閣)와 지근거리에 있었다. 출입구는 오직 한 곳. 동쪽과 남쪽은 성벽으로, 북쪽과 서쪽은 높은 담장으로 사방이 가로막혀 있었다. 윤 의사가 갇힌 오사카 육군 위수형무소는 붉은색 벽돌로 지어진 삭막한 공간이었다.

근대사 다큐멘터리 제작사 ‘더 채널’의 김광만 PD는 “1928년 일본 오사카 육군 위수형무소 일대를 촬영한 항공사진과 1931년 작성된 실측도를 일본 오사카 시청과 나카노시마 도서관에서 찾아냈다”고 18일 밝혔다. 실측도는 윤 의사가 순국하기 1년 전 작성돼 당시 정황을 거의 고스란히 반영하고 있다.

○ 성벽과 해자로 둘러싸인 오사카 형무소

현재 오사카성 경내는 공원으로 대폭 정비되면서 형무소를 비롯한 군 시설은 모두 철거된 상태다. 그러나 일제가 대륙 침략을 본격화한 1930년대 이곳에는 일본 육군 4사단 사령부가 진을 치고 있었다. 이번에 입수한 실측도에 따르면 덴슈카쿠 근처에 4사단 사령부 건물이 들어선 가운데 바깥 해자와 맞닿은 남동쪽 모서리에 총 10개동의 건물로 구성된 형무소가 있었다.

각 건물의 명칭이 실측도에 표기돼 있지 않아 윤 의사가 갇혔던 감방의 위치를 정확히 파악하기는 힘들다. 그러나 현재 서울 용산 미군기지 안에 일부 건물이 남아있는 일본군 위수형무소의 구조를 감안할 때 부지 가운데 자리 잡은 직사각형 건물에 윤 의사의 감방이 있었을 걸로 추정된다. 김 PD는 “용산 일본군 형무소도 부지 외곽에 병동과 식당 등 지원시설을 두고 가운데 감방을 설치했다”고 설명했다.

윤 의사는 1932년 4월 29일 중국 상하이(上海) 훙커우(虹口) 공원에서 일본군 지도부를 향해 폭탄을 던진 직후 체포돼 그해 5월 25일 상하이 파견군사령부 군법회의에서 사형선고를 받았다. 일본은 윤 의사를 공개 처형할 경우 한국 독립운동을 자극할 수 있음을 우려해 11월 18일 그를 우편수송선에 태워 오사카로 보냈다. 윤 의사는 오사카 형무소에서 한 달 동안 독방에 갇혀 있다가 일본 육군 9사단 사령부가 있던 가나자와(金澤)로 옮겨진 직후 총살당했다.

당시 한국인이 많이 살던 오사카 시내에서 윤 의사 처형을 반대하는 삐라가 뿌려지는 등 민심이 심상치 않자 가나자와에서 사형을 집행한 걸로 분석된다. 윤 의사 의거로 가나자와에 사령부를 둔 육군 9사단장 우에다 겐키치가 왼쪽 다리를 잃은 것도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인다.

○ 철통 보안 속 진행된 처형

일본 육군성이 작성한 비밀보고서인 만밀대일기(滿密大日記)에 따르면 윤 의사 이송과 처형은 극비리에 이뤄졌다.

윤 의사는 1932년 11월 18일 일본 고베항에 도착하자마자 취재진의 접근이 차단된 상태에서 헌병 10여 명에게 둘러싸여 오사카 형무소로 옮겨졌다. 한 달 동안 독방에서 보낸 그는 1932년 12월 18일 오전 6시 25분 오사카역을 출발해 오후 4시 35분 모리모토역에서 내렸다. 처형 장소가 외부에 알려질 것을 우려한 일본 헌병대가 본래 목적지(가나자와)보다 한 정거장을 지나서 내린 것이다.

이날 저녁 가나자와 일본군 9사단 구금소에 수감된 윤 의사는 순국 직전 13시간을 뜬눈으로 지새웠다. 다음 날 오전 6시 30분 그는 헌병 3명, 간수 2명과 함께 구금소를 출발해 오전 7시 15분 형장에 도착했다.

처형 직전 일본군 검찰관은 “상해파견군 군법회의가 살인과 살인미수, 상해, 폭발물단속벌칙 위반에 의해 언도한 사형을 집행한다”고 말한 뒤 유언이 있느냐고 물었다. 이에 윤 의사는 “사형은 이미 각오했으니 이 시기에 임해 아무런 할 말이 없다”고 대답했다. 보고서는 그가 일본어로 명료하게 답하면서 침착한 태도였고 엷은 웃음을 지었다고 기록했다. 오전 7시 27분 형틀에 묶인 윤 의사에게 사격 명령이 떨어졌고, 13분 뒤 군의관이 사망을 확인했다. 그의 나이 불과 스물넷이었다.

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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