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성하 기자의 서울과 평양사이]장성택 가문을 관통한 ‘사위의 저주’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12월 1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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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12월 13일 북한 노동신문에 실린 장성택 노동당 행정부장의 마지막 사진. 신문은 장 부장이 전날인 12일 특별군사재판을 받은 뒤 형법 제60조에 따라 즉시 처형됐다고 밝혔다. 동아일보DB
2013년 12월 13일 북한 노동신문에 실린 장성택 노동당 행정부장의 마지막 사진. 신문은 장 부장이 전날인 12일 특별군사재판을 받은 뒤 형법 제60조에 따라 즉시 처형됐다고 밝혔다. 동아일보DB
주성하 기자
주성하 기자
어제(13일)는 장성택 전 북한 노동당 행정부장 처형 소식이 전해진 지 4년째 되는 날이다. 세계가 경악했던 그날이 어제 같은데 벌써 시간이 많이 흘렀다.

김일성의 사위에서 “개만도 못한 만고의 역적”으로 낙인찍혀 돌봐줬던 조카의 손에 처형당한 장성택의 일생은 통일 후에도 이런저런 이야기 소재로 꽤 많이 활용될 듯싶다. 지난 4년간 장 씨에 대해 이런저런 정보를 적잖게 들었다. 그는 캘수록 흥미로운 인물이었다.

1980년대 말에 벌써 김정일을 가리켜 “저런 난봉꾼이 권력을 잡았으니 우린 희망이 없다”며 극소수 친한 지인들과 통음했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그만큼 김정일을 잘 아는 사람도 없을 것이다. 그러면서도 장 씨는 김정일을 도와 손에 피도 많이 묻혔다. 그는 사위-매부-고모부의 굴레를 벗어던지지 못했다.

특히 장성택과 그의 가문을 보면 ‘사위의 저주’란 단어를 떠올리지 않을 수가 없다.


장성택을 닮은 듯, 장씨 집안의 사위들은 누구도 비운의 운명을 벗어나지 못했다. 이 가문은 전생에 ‘사위’와 무슨 지독한 악연이 있을까 싶을 정도다.

김경희가 아버지 김일성을 비롯한 온 집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끝까지 장성택을 쟁취한 러브스토리는 이미 널리 알려져 있다. 그렇게 시작은 아름다웠으나 말로는 비참했다.

장성택의 형제들 역시 공교롭게도 모두 딸이 한 명씩 있었는데 사위들의 운명은 모두 비극으로 끝났다.

맏형 장성우의 외동딸은 숙모 김경희와 똑같은 방식으로 남자를 점찍고 쟁취했다. 그가 반한 남자는 1990년대 북한 최고 미남 배우로 뭇 여성의 선망의 대상이던 공훈배우 최웅철이었다. 당시 최 씨는 약혼녀가 있었다. 그러나 권세가 하늘을 찔렀던 장씨 집안의 장녀를 뿌리치지 못했다.

최 씨는 결혼 후 배우를 그만두고 평양에서 택시회사를 경영하는 사업가로 변신했다. 사업은 당연히 잘됐다. 하지만 그런 삶도 10년 남짓. 그는 장성택이 체포된 뒤 심상치 않은 눈치를 채고 처남인 말레이시아 대사 장용철의 도움으로 해외로 도망치려다 체포돼 비밀처형됐다. 누구나 다 아는 배우였던 그는 지금 북한에서 철저히 매장됐다. 그가 처형된 뒤 북한은 그가 출연한 영화 25편에 대해 시청 금지 및 비디오테이프 몰수령을 내렸다. 이 중엔 북한이 시대의 명작이라 선전했던 영화도 다수 포함됐다. 탈출 시도만 안 했어도 조카사위라는 것만으론 처형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

둘째 형인 장성길의 외동딸은 평양외국어대를 다니다 동창에게 반해 결혼했다. 장성택은 둘째 조카사위를 자신이 수장인 행정부 산하 54부 통역원으로 받아 키워주었다. 54부는 북한의 ‘알짜’ 외화벌이 이권을 거머쥔 부서였다. 장성택 처형과 함께 행정부는 전원 숙청됐다. 장 씨의 최측근인 장수길 행정부 부부장 겸 54부장은 장성택보다 20일쯤 먼저 처형됐다. 태영호 전 주영 북한대사관 공사는 “행정부의 부부장과 과장 15명이 총살당하고, 그 아래로는 전 가족이 정치범수용소로 갔다. 북한 역사상 한 부서 전체가 이렇게 당한 것은 처음이었다”고 증언했다. 장성택 조카사위의 운명이야 더 말할 필요조차 없다. 그가 54부에만 들어가지 않았다면 큰 화는 면했을지 모른다.

장성택의 누나 장계순의 외동딸은 김일성대 영문과를 졸업하고 장씨 집안의 외동딸 중 제일 먼저 결혼했다. 김경희가 중매를 선 것으로 알려졌다. 그런데 상대가 하필 황장엽 전 노동당 비서의 외아들인 황경모였다. 1997년 2월 황 전 비서의 한국 망명으로 그는 가족과 함께 자택연금됐지만 그해 10월 말 보위부의 감시를 따돌리고 탈출했다. 당시 34세였던 황경모는 김일성대 철학부를 졸업한 수재에 태권도 7단 유단자이기도 했다. 그러나 끝내 북한을 벗어나지 못하고 보름 뒤 평북 용천군 어느 산골에서 체포돼 곧바로 처형된 것으로 전해진다. 당시는 장씨 가문의 기세가 서슬 퍼럴 때라 장계순의 딸은 이혼 절차를 밟고 집에 돌아왔지만, 충격으로 오랫동안 독수공방했다.

장성택과 김경희 사이에도 외동딸 장금송이 있었다. 그러나 그는 프랑스 파리 유학 중이던 2006년 자살했다. 한국에는 장금송이 1978년생으로 알려졌지만, 실제는 그보다 2∼3세 어리다. 그는 유학 중 만난 백인 남성을 사랑하게 됐지만, 부모가 강력히 반대하자 우울증에 걸려 목숨을 버렸다. 상대가 네덜란드 국적이란 말이 있지만 확실치는 않다. 어머니 김경희는 장성택이 아니면 자살하겠다고 했고, 그 피를 받은 딸은 진짜로 자살했다. 장성택은 사위를 볼 기회도 없었다.

장씨 집안의 여인들은 아직까진 생존한 것으로 전해진다. 그러나 부모 잃고, 남편 잃고, 기댈 곳도 없는 그 처지가 지금 알코올의존증에 빠져 치료 중인 김경희를 꼭 닮았다. 이 여인들의 덧없는 일장춘몽(一場春夢)이여.

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장성택#장성택 처형#김일성#김경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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