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 투 더 동아/12월 12일]“살아 있다면 대통령감”…조영래 변호사, 너무 빨리 세상 떠나다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12월 11일 18시 2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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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5월 22일자 동아일보는 그를 ‘민주화 운동사의 거룩한 영웅’이라고 불렀다. 이튿날에는 나중에 국가정보원장이 되는 이종찬 전 의원 발언을 통해 ‘그가 살아 있다면 대통령감’이라고 평가했다. ‘그’는 바로 조영래 변호사(1947~90)였다.




동아일보 객원편집위원으로 활동하기도 했던 조 변호사가 어떤 인물이었는지는 그가 세상을 떠난 1990년 오늘(12월 12일)자 동아일보 부고 기사를 보면 알 수 있다. 다음은 당시 기사 인용 부분.

“그가 맡은 사건 중 대표적인 것은 경기 부천경찰서 성(性) 고문 사건의 권인숙 양 변론과 서울 마포구 망원동 수재민 집단 소송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성고문 사건이 터지자 부천경찰서와 인천 소년교도소를 수십 차례 오가며 경찰관이 22세의 여대생을 대상으로 자행한 추악한 성고문 범죄를 폭로하고 5공(제5 공화국)이 무너진 뒤 고문 경관 문귀동을 마침내 법정에 세워 법의 심판을 받도록 했다.
그가 직접 쓴 장문의 권 양 사건 변론요지서는 진실을 밝히기 위한 권 양의 용기를 찬양하고 경찰·검찰 그리고 공안당국 등 권력기관의 부도덕성을 질타한 대표적 노작으로 꼽혀진다.


‘권 양, 온 국민이 그 이름은 모르는 채 그 성(姓)만으로 알고 있는 유명인사, 얼굴 없는 우상이 되어버린 이 처녀는 누구인가. … 목숨을 건 진실에의 열정 하나만으로 권 양은 끝내 이 불의한 세상의 온갖 권세를 이겨냈습니다. 국가 공권력에 의해 인간의 존엄성이 이처럼 여지없이 짓밟히는 사태가 더 이상 지속되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권 양이 그토록 밝히려고 노력했던 진실은 마침내 그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19)84년 서울의 대홍수 때 망원동 유수지의 배수갑문이 무너져 한강 물이 역류하면서 일대 5000여 가구가 물에 잠겼다. 그는 국가를 상대로 한 2400여 가구 수재민들의 소송을 맡아 3년의 법정 투쟁 끝에 승소로 이끌었다. 우리나라 사법사상 최초의 집단 소송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헌법의 기본권과 관련된 사건은 아무리 작은 사건이라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직장에 다니는 미혼 여성 이경숙 씨가 교통사고로 다리를 심하게 다치자 1심 재판부는 스물다섯 (살)까지만 직장 봉급으로 손해배상액을 계산하고 나머지 쉰다섯 살까지는 일용잡금직노임으로 산정하는 판결을 내렸다.
미혼 여성은 결혼하면 직장을 그만두는 관습에 따라 여성의 평균 혼인 연령인 스물다섯 살을 정년으로 본 판결이었다. 그는 이 씨를 설득해 2심 변론을 무료로 맡아 남녀불평등의 판례를 바꾸어 놓았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그 유명한 김지하의 ‘양심선언문’을 쓴 것도 사실 조 변호사였다. 서울 청계천 봉제공장에서 일하다 분신자살한 전태일을 우리 모두가 기억하는 이름으로 만든 ‘전태일 평전’을 세상에 남긴 것 역시 그였다. 조 변호사가 없었다면 2017년 대한민국은 지금과 크게 다른 모습이었을지 모른다.

조 변호사가 운명을 바꾼 인물이 한 명 더 있다. 조 변호사는 법무법인 ‘김앤장’에서 변호사 생활을 시작했다. 그는 운동권 후배가 사법연수원을 차석으로 졸업하고도 시위 전력 때문에 판사 임용에서 탈락하자 김앤장 입사를 권했다. 이 후배는 고액 연봉을 주겠다는 제안을 뿌리치고 부산으로 내려가 사법시험 동기가 소개한 노무현 변호사와 합동법률사무소를 차린다. 맞다, 이 후배는 바로 문재인 대통령이다.

2015년 12월 11일 열린 ‘시대를 밝힌 자랑스러운 변호사 조영래 기념행사’에 참석한 박원순 서울시장(왼쪽)과 문재인 대통령. 사진 전영한 기자 scoopjyh@donga.com
2015년 12월 11일 열린 ‘시대를 밝힌 자랑스러운 변호사 조영래 기념행사’에 참석한 박원순 서울시장(왼쪽)과 문재인 대통령. 사진 전영한 기자 scoopjyh@donga.com


조 변호사가 숨지고 이틀이 지난 그해 12월 14일 서울 YWCA 강당에서 열린 영결식에는 1000여명이 참석했다. 계훈제 김근태 김문수 노무현 문익환 박원순 서경석 송건호 이소선 이재오 그리고 조갑제 등 당시 참석자 면면은 지금 봐도 화려하다.

조 선생은 추모사에서 “조변(辯·변호사)은 작은 것의 소중함과 아름다움을 아는 이였다. 그는 연탄 공장의 진폐증 환자, 스물다섯에 정년퇴직해야 했던 여자, 분신자살한 젊은 노동자, 이런 작은 이들의 문제 속에서 이 역사와 우리 사회를 알리는 의미를 뽑아냈다”고 평가했다.

사진 동아일보DB
사진 동아일보DB

조 변호사는 정말 그런 사람이었다. 1990년 1월 컬럼비아대 초청을 받아 미국에 머물던 중 당시 열여섯 살이던 아들에게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 사진으로 된 엽서를 띄우며 이렇게 썼다.

“아빠가 어렸을 때는 이 건물이 세계에서 제일 높은 건물이었다. 아빠는 네가 이 건물처럼 높아지기를 바라지 않는다. 세상에서 제일 돈 많은 사람이 되거나 제일 유명한 사람, 높은 사람이 되기를 원하지도 않는다. 작으면서도 아름답고, 평범하면서도 위대한 건물이 얼마든지 있듯이… 인생도 그런 것이다. 건강하게, 성실하게, 즐겁게, 하루하루 기쁨을 느끼고 또 남에게도 기쁨을 주는, 그런 사람이 되기를 바랄 뿐이다. 실은 그것이야말로 이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처럼 높은 소망인지도 모르겠지만….”

1990년 오늘 한국은 조영래를 잃었다.(김형만 ‘그들이 살았던 오늘’)

황규인 기자 kin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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