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최재경]기생충과 법률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11월 2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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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했던 때, 기생충은 흔했다… 1966년 나온 기생충질환예방법
입법목적 완수 뒤 행복한 사멸
JSA 귀순병사 몸속 기생충은 50년 시차 속 존재하는 북 실상
남북한 격차 어떻게 해소할지… 마땅히 해야 할 통일 대비를

최재경 객원논설위원 법무연수원 석좌교수
최재경 객원논설위원 법무연수원 석좌교수
최근 판문점에서 귀순 중 총상을 입고 의식불명이던 북한군 병사가 두 차례의 대수술 끝에 의식을 되찾고 회복 중이라 한다. 기쁜 일이다. 국군의 목숨을 건 구조, 이국종 아주대 교수 등 의료진의 헌신적 봉사와 대한민국의 뛰어난 의료 기술이 함께 이뤄낸 기적이다. 수술 과정에서 많은 기생충이 발견되었다는 소식에 국민은 모두 경악했다. 의학 교과서에서나 볼 수 있는 희귀한 기생충, 그 엄청난 수에 의사들조차 놀라고 애를 먹었다니 기생충을 제대로 본 적도 없는 젊은 세대는 더 놀랐을 것이다.

기생충(parasite)은 고대 그리스어에서 이름이 유래됐을 정도로 오래됐다. 고대 이집트 왕은 물론 백성의 미라에서도 어김없이 회충 알이 검출되고, 심지어 3만 년 전의 회충 알까지 확인되었다니 가히 인류와 함께 살아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40대 이상의 사람들에게 기생충은 낯설지 않다. 어린 시절 지척에 살며 애를 먹이더니 어느 날 갑자기 자취나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린 비호감 친척이나 이웃, 그런 존재가 아닐까?

대한민국이 가난하고 힘들던 시절 기생충은 흔했다. 1967년 8월 처음 전 국민을 대상으로 조사했을 때 기생충 감염률은 80%로 발표됐지만 실제 98%였다는 통계도 있다. 누구나 몸속에 회충, 요충, 십이지장충 몇 마리쯤 키우고 살았다. 당시 신문 기사를 보면 끔찍한 내용이 적지 않다. 국군 환자 배에서 양동이 하나를 가득 채울 회충을 빼냈다거나, 9세 소녀에게 1063마리의 회충이 우글거렸다는 등등. 그 소녀는 치료 중 숨졌는데 한 해 기생충 감염 사망자가 2000명을 넘기기도 했던 부끄러운 시절이었다.


현재 대한민국에서 기생충은 찾아보기 힘들다. 기생충이 사라지니 아토피가 늘었다며 기생충부활론까지 나오는 판이니 격세지감이다. 회충 암컷 한 마리가 하루 20만 개의 알을 낳는다는데 그 많던 기생충은 다 어디로 갔을까? 1966년 4월 법률 제1789호로 제정된 ‘기생충질환예방법’이 일등 공신이다. 이 법은 ‘기생충 질환의 예방과 근절로 국민 보건 향상과 증진에 기여함’을 목적으로 제정되었다. ‘기생충 질환’은 회충병, 십이지장충병, 간(폐) 지스토마병, 조충병 등을 의미했다. ‘지스토마’는 편충류 디스토마(distoma)의 당시 표기인데 현재는 북한말로만 남아 있다.

대책은 두 가지 방향으로 추진됐다. 감염되기 쉬운 지역에 있거나 공중과 접촉이 많은 자는 연 1회 이상 검사·치료를 받도록 하고, 학교장은 연 2회 이상 학생의 기생충 감염 여부를 검사하고 치료시킬 의무가 있었다. 모든 학생이 분변 검사를 받고, 선생님과 친구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하늘이 노래지는 구충제를 억지로 먹는 곤욕을 치렀던 추억은 이 법 때문이다.

공동우물, 공중변소 및 분뇨처리시설 등을 위생적으로 관리하고 수세식 변소 확대, 전국 55개 지역의 인분 사용 금지 등 예방 대책도 함께 추진됐다. 그 결과 1971년 84%이던 기생충 감염률이 1976년 63%, 1981년 41%, 1986년 12%로 꾸준히 낮아졌고, 1996년에는 사실상 0%에 가까워져 학생들의 채변 검사도 폐지됐다.

법률은 사회적 유기체로 탄생(입법), 성장(개정), 사멸(폐지)의 순환을 겪는다. 악법으로 비난받다가 사문화·폐지되는 경우가 드물지 않은 현실에서 ‘기생충질환예방법’은 입법 목적을 완벽하게 달성하였으니 행복한 일생을 살았다고 할 수 있다.

이번 북한군 병사 사건을 지켜보며 많은 소회가 있었다. 가뜩이나 식량난으로 영양이 부족한데 기생충까지 괴롭히면 건강이 망가지고, 심하면 생명도 위협받는다. 최고 대우를 받는 공동경비구역(JSA) 병사 체내에 기생충이 가득하다는 것은 북한이 지상낙원은커녕 생존조차 기약하기 힘들 정도로 열악한 상황임을 웅변한다. 그가 다섯 발의 총알을 맞으며 순식간에 뛰어넘었던 군사분계선(MDL)은 50∼60년의 시차 속에 존재하고 있다. 그 어떤 홍보나 광고도 이 기생충 이상으로 북한의 낙후된 실상을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없었을 것이다.

통일은 당위다. 하지만 기생충이 여실히 드러낸 남북 간의 격차를 어떻게 감당하고 해소해 나갈 것인지에 대해 치밀한 연구가 필요하다. 북한 주민에게 구충제를 지원하고, 기생충 퇴치 경험을 전수하는 등 인도적 노력도 병행해야 한다.

북한군 병사 오모 씨가 쾌유하고, 자유 대한민국에서 애초 가졌다는 법학도의 꿈을 이룰 수 있기를 기원한다. 그래야만 그를 숙주로 삼았던 기생충들이 의도하지는 않았더라도 최소한의 속죄를 하는 해피엔딩이 되지 않겠는가?
 
최재경 객원논설위원 법무연수원 석좌교수
#북한군 병사 기생충#북한군 병사 사건#통일은 당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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