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은철의 스토리와 치유]<12>무지개 나라의 에이미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11월 1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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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석하게도, 이 세상에는 누군가의 손에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심신이 망가지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다. 그런데 상처에도 불구하고, 아니 상처로 인해, 아름다워지는 사람들이 있다. 에이미의 부모가 그런 경우다. 그들이 특별한 건 과거 청산과 관련하여 아름다운 선례를 남긴 세계사적 사건과 깊은 관련이 있어서다.

에이미 빌. 그녀는 미국 스탠퍼드대를 졸업하고 풀브라이트 장학금을 받아 남아프리카공화국 웨스턴케이프대에 가서 인권을 연구했다. 연구를 마치고 미국으로 돌아가기 이틀 전인 1993년 8월 25일이었다. 그녀는 흑인 친구들을 흑인 거주지인 구굴레투에 데려다주던 참이었다. 백인 여성이 차를 운전하고 들어오자, 흑인 남성들이 그녀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앞 유리가 벽돌에 맞아 깨졌다. “나는 당신들 편입니다”라고 하소연했지만 소용없었다. 그녀는 차를 버리고 달아나다가 결국 칼에 찔려 죽었다. 남아프리카 백인들에 대한 증오가 어이없게도, 남아프리카 흑인들의 인권, 특히 흑인 여성들의 인권 문제를 연구하러 온 스물여섯 살의 젊은이를 향해 표출된 것이다. 그들이 속한 ‘범아프리카회의(PAC)’에서 학습한, 백인 식민주의자들에 대한 증오감 때문이었다.

네 명의 주범은 18년 형을 선고받고 복역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몇 년이 지난 1996년, 그들이 ‘진실과화해위원회(TRC)’에 사면을 신청했다. 그리고 청문회를 거쳐 1998년 극적으로 풀려났다. 더욱 극적인 것은 에이미의 부모가 청문회에 참석해 딸을 죽인 자들의 사면을 지지했다는 것이다.

반인륜적인 아파르트헤이트 정권(1948∼1994년)이 지속되는 동안, 정치적인 목적으로 행해진 폭력의 진실을 밝히되 처벌하지 않고 사면함으로써 과거와 화해하고, 서로 다른 인종들이 아름답게 공존하는 ‘무지개 나라’로 만들겠다는 것이 ‘진실과화해위원회’의 설립 취지였다. 진실을 밝히고 용서하는 데 국가가 개입한 것이다. 아픈 상처를 끄집어내야 하는 고통스러운 일이었고 악용하는 사례도 있었기에 부작용도 많았지만, 세계 역사에 길이 남을 고귀한 발상이었다. 미국인들인 에이미의 부모도 그 취지에 동참했다. 그들은 살인자들을 용서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했는지, 에이미재단을 설립하여 구굴레투를 비롯한 흑인 지역에서 2000명이 넘는 어린이들을 위해 방과 후 프로그램을 운영했다. 살인자 중 둘에게는 재단의 실무까지 맡겼다.

용서할 수 없는 것을 용서하는 게 진짜 용서라는 절대적인 윤리를 실천에 옮긴 사람들. 이처럼 상처와 고통을 딛고 사랑과 용서의 꽃들을 피워내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눈부신 윤리의 나침반이다.
 
왕은철 문학평론가·전북대 교수
#에이미 빌#아파르트헤이트 정권#용서할 수 없는 것을 용서하는 게 진짜 용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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