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통사람들이 쓴 ‘위대한 자서전’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10월 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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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주 교하도서관 개관 9주년 특별전
‘믹스 커피’ ‘동치미 막국수’… 주민 12명 과거의 기억 글로 표현
인생사에 시대의 생활상 담겨

경기 파주시 교하도서관이 지역 주민과 함께 진행한 자서전 발간 프로젝트 ‘기억의 재생’ 참가자들이 각자 자신의 자서전을 들고 포즈를 취했다. 황태호 기자 taeho@donga.com
경기 파주시 교하도서관이 지역 주민과 함께 진행한 자서전 발간 프로젝트 ‘기억의 재생’ 참가자들이 각자 자신의 자서전을 들고 포즈를 취했다. 황태호 기자 taeho@donga.com
전남 보성이 고향인 김명자 씨(74·여). 김 씨는 6·25전쟁 직후 전후 구호품으로 받은 믹스 커피를 처음 접한 날을 잊지 못한다. ‘왜 이렇게 쓴 가루를 먹나’ 하는 궁금증은 그로부터 15년쯤 뒤 현재의 남편과 데이트를 하러 다방에 가서야 풀렸다. 그 덕분에 김 씨에게 믹스 커피는 지금도 전쟁을 떠올리게 하는 물건이다. 김 씨가 쓴 글 ‘믹스 커피’에는 보성의 시골 마을까지 쳐들어와 “야, 이 간나 새끼들”이라며 호통을 치던 북한군, 할머니와 옆집 아주머니를 살해한 빨치산 잔당 등 우리 현대사가 곳곳에 녹아 있다.

경기 파주시 교하도서관은 개관 9주년을 맞아 특별한 전시를 열었다. 파주 주민 12명의 인생사를 담은 자서전을 펴내면서 그들의 소장품과 각종 기록을 엮어 ‘기억의 재생’이라는 주제의 전시를 마련한 것이다. 유명 인사가 아닌, 우리 주변에서 흔히 만날 수 있는 이들의 기억을 헤집어 과거를 복원한 것이다. 전은지 교하도서관 사서는 “역사 속에서는 무명의 일반인이지만 그들의 기억에는 그 시대의 생활상이 오롯이 담겨 있다”고 말했다.

12명의 자서전 집필자는 책을 쓰기 위해 올 6월부터 두 달가량 김남기 소동출판사 대표와 함께 워크숍을 진행했다. 사물, 감각, 장소, 인간관계 등 주제를 정해 스스로도 잊고 지냈던, 기억 속 깊숙한 곳의 과거를 꺼내 오는 과정이었다.

최고령 집필자는 올해 83세인 곽인숙 할머니다. 평북 신의주가 고향인 곽 할머니는 12세 때 38선을 넘어 월남했다. 그는 아직도 고향에서 즐겨 먹던 ‘김치말이 동치미 막국수’ 맛을 잊지 못한다. 곽 할머니는 자서전에 고향의 맛을 기록하면서 ‘사과, 배, 잣, 조기젓, 조개젓, 고차가루, 마늘, 생강을 넣는데 마늘과 생강은 큰 절구에 쿵쿵 찧어서 이 재료를 큰 대야에 가득 준비한 뒤 배추와 통무 절인 것에 속을 꼭꼭 넣는다’고 레시피를 적었다.

세상을 떠난 부모를 그리워하는 사연도 많다. 충남 공주에서 태어난 양재숙 씨(69·여)는 자서전에서 ‘가끔 책이나 신문을 더듬더듬 읽으려고 애쓰실 때 그것이 얼마나 글자를 읽고 싶은 열망이었는지를 그때는 몰랐었다. …엄마 미안해, 정말 미안해’라고 적었다. 이재연 씨(69·여)는 글 대신 그림으로 기억을 기록했다. 이 씨는 ‘옛날 보리밥’ ‘천렵 가던 날’ ‘시냇가 빨래터’ ‘벼메뚜기 잡기’ 등 당시의 농촌 풍경을 유화, 수채화에 세밀하게 담아냈다.

이번 일반인 자서전 출간을 기획한 김남기 대표는 “자서전 집필에 참여한 분들은 대부분 힘든 한국 현대사를 거치며 갖은 고생을 겪은 분들”이라며 “과거를 돌아보고 스스로를 표현하는 과정에서 위안을 얻은 이들도 많다”고 말했다. 이들 일반인 12명의 자서전은 합본돼 교하도서관에 비치될 예정이다.
 
황태호 기자 taeho@donga.com
#위대한 자서전#파주 교하도서관 개관 9주년 특별전#일반인 자서전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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