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핀 킬러, 찰리를 찾아라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9월 26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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빚 5억 때문에… 필리핀 초대해 740만원에 청부살해
‘살인교사 혐의’ 40대 한국인 구속

“탕탕탕! 탕탕탕!”

6발의 총성이 울렸다. 불과 2m 앞에 있던 한국인 관광객 허모 씨(당시 64세)가 풀썩 쓰러졌다. 땅 위로 피가 흘러 나왔다. 오토바이를 타고 접근해 총을 쏜 괴한 2명은 재빨리 방향을 바꿔 사라졌다. 허 씨는 그 자리에서 숨졌다. 2014년 2월 18일 오후 7시경 필리핀의 관광도시인 앙헬레스의 한 호텔 앞에서 벌어진 일이다.

허 씨는 이날 귀국 비행기를 탈 예정이었다. 닷새간의 필리핀 여행 마지막 날이었다. 평소 알고 지내던 현지 사업가 신모 씨(43)의 초대를 받고 온 여행이었다. 허 씨는 “함께 저녁을 먹자. 호텔 앞에서 만나자”는 신 씨 연락을 받고 일행들과 도로변에서 기다리다가 변을 당했다.


한국 경찰은 난감했다. 범행 무대는 치안이 허술한 필리핀이었다. 범인의 흔적도 찾기 어려웠다. 경찰은 허 씨가 일행 3명과 함께 있었지만 총탄 6발이 모두 허 씨에게 집중된 점을 주목했다. 청부살인 가능성이 의심됐다.

허 씨를 필리핀으로 초대한 신 씨가 용의선상에 올랐다. 조사결과 신 씨는 허 씨로부터 사업자금으로 5억 원을 투자받았지만 도박으로 거의 탕진한 상태였다. 돈을 갚기로 한 날이 다가오고 있었다. 경찰은 신 씨를 상대로 “돈을 갚지 않으려고 허 씨를 청부살해한 것 아니냐”고 추궁했다. 하지만 신 씨는 “내가 형님을 왜 죽이느냐”며 전면 부인했다. 이를 뒤집을 증거가 없었다. 범행 동기만으로 신 씨를 범인으로 단정 지을 수 없었다.

하지만 신 씨에게 약점이 있었다. 그는 필리핀에서 제법 활발하게 사업을 했다. 그런데 영어가 서툴렀다. 혼자서는 현지인과 잘 대화하지 못했다. “수시로 영어 통역을 대동한다”는 주변의 진술이 나왔다. 경찰은 신 씨가 청부살해범과 거래하기 위해 통역을 동원했을 가능성에 희망을 걸었다. 앙헬레스 한인타운을 샅샅이 수소문했다. 수사 착수 1년 2개월 만인 2015년 4월 경찰은 당시 통역을 했던 필리핀인 운전기사 A 씨를 만났다.

“신 씨는 그를 찰리라고 불렸어요. 찰리.”

A 씨는 신 씨가 청부살인범을 만났던 날을 또렷이 기억하고 있었다. 찰리는 청부살인업자의 가명이었다. 하지만 통역의 이 같은 진술에도 신 씨는 여전히 살인교사 혐의를 부인했다. 허 씨에게 총을 쏜 범인을 잡지 못한 탓에 경찰은 신 씨의 ‘잡아떼기’ 전략에 속수무책이었다.

경찰은 현지 탐문 조사 끝에 한국인 사업가와 일하는 필리핀인 B 씨를 만날 수 있었다. ‘찰리’의 친구였다. 그는 오랜 침묵 끝에 입을 열었다.

“찰리가 ‘미스터 신(Mr. Shin)’의 부탁을 받고 한국인을 죽인다며 나한테서 총을 빌려갔어요.”

B 씨는 찰리의 실명과 나이 등 신상정보까지 진술했다. B 씨 도움으로 찰리가 허 씨를 살해할 당시 오토바이를 몰았던 공범도 찾아냈다. 이번만큼은 신 씨도 빠져나갈 수 없었다. 경찰은 찰리와의 대화 내용, 오토바이 운전자의 진술서 등을 내밀며 신 씨를 압박했다.

“죄책감 때문에 고통스러웠습니다.”

신 씨는 사건 발생 3년 4개월 만인 올해 6월 살인교사 혐의를 자백했다. 당시 신 씨는 30만 페소(약 740만 원)를 주고 청부살인범을 고용했다. 신 씨는 경찰 조사에서 “범죄율이 높은 필리핀에서는 청부살인을 저질러도 적발되지 않을 것으로 생각했다”고 말했다.

어렵게 신 씨의 입을 열었지만 경찰에겐 마지막 관문이 남았다. 허 씨를 죽인 ‘찰리’를 검거하지 않은 채 살인교사범을 먼저 구속하기가 쉽지 않았다. 검찰도 처음에는 “살인범의 실체가 불분명하다”며 보강 수사를 지시했다. 경찰은 신 씨를 출국금지한 뒤 추가 증거를 찾기 시작했다. 신 씨가 찰리에게 살인을 청부하며 스마트폰으로 허 씨 사진을 보낸 사실과 사건 발생 직전 원화를 페소로 환전한 명세 등의 증거가 새로 발견됐다. 신 씨는 18일 살인교사 혐의로 구속됐다.

구특교 기자 kootg@donga.com
#필리핀#청부살해#살인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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