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잡史]조선 여심 사로잡은 가체… 초가집 수십채 가격 달해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9월 1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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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체장

머리 타래를 만드는 모습을 묘사한 그림. 프랑스국립기메동양박물관 제공
머리 타래를 만드는 모습을 묘사한 그림. 프랑스국립기메동양박물관 제공
“가장이 금하지 못하니, 부녀자들이 가체를 더 사치스럽게 하고 더 크게 만들지 못할까 걱정이다. 근래 어떤 집의 열세 살 난 며느리가 가체를 높고 무겁게 만들었다. 시아버지가 방 안에 들어오자 며느리가 갑자기 일어서다가 가체에 눌려 목뼈가 부러졌다.”(이덕무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에서)

조선시대 패션은 화려했다. 남성은 수정을 잇댄 갓끈과 옥으로 만든 관자, 귀걸이로 꾸몄다. 여성은 풍성한 가체(加체)와 현란한 비녀, 노리개로 치장했다. 길고 화려한 갓끈, 높고 풍성한 가체는 요샛말로 ‘잇템’(꼭 갖고 싶은 아이템)이었다.

하지만 조선은 엄숙했다. 귀걸이는 선조, 가체는 정조 때에 금지했다. 귀를 뚫는 일은 몸을 훼손하는 불효였고 가체는 검소한 미풍을 해치는 사치였기 때문이다. 그래도 여성들은 가체를 버리지 못했다. 정조실록에는 가체 단속을 빙자해 돈을 뜯어낸 사기꾼 일당 얘기가 나온다.

가체를 만드는 데는 ‘가체장(匠)’의 전문 지식과 기술이 필요했다. 66세 영조와 15세 정순왕후의 혼례를 기록한 ‘영조정순후가례도감의궤’에 따르면 가체를 만드는 가체장은 당주홍, 홍합사, 황밀, 송진, 주사, 마사, 홍향사, 소금, 참기름 등을 썼다. 다양한 성분의 분말로 만든 용액에 수거한 머리칼을 담가 곧게 펴고 탈색했다. 수거한 머리칼은 곱슬머리와 직모, 갈색과 검은색 등 모질과 색이 제각각이었기 때문이다. 탈색한 머리카락은 짙은 검은색으로 염색했다.

조선 남성은 상투를 맵시 있게 틀려고 정기적으로 정수리를 깎았다. 이를 ‘베코 친다’고 불렀다. 남성은 베코 쳐 맵시를 더했고, 여성은 그 머리카락으로 가체를 얹어 아름다움을 더했다. 가체를 만드는 데는 죄인이나 승려의 머리카락도 썼다.

가체는 단순히 빗으로 빗고 길게 잇대며 땋는 게 아니었다. 이른바 검은 구름처럼 풍성하면서 윤기 흐르는 가체를 만들려면 다양한 용액을 다루는 기술과 함께 유행에 맞춰 땋는 기술도 필요했다. 먼저 빗으로 가지런히 빗어 머리 타래를 만들었다. 이어 ‘말이 쓰러지는 듯’ 기운 모양새로 땋아 촛농으로 고정했다. 이렇게 기본 모양새를 잡은 뒤 광택을 내면 검은 구름처럼 풍성하면서도 윤기 흐르는 가체가 완성됐다.

가체는 체괄전(체괄廛·가발 전문매장)에서 팔거나 여쾌(女쾌·뚜쟁이), 수모(手母·미용사)가 방문 판매했다. 가체는 고가에 거래됐다. 재료가 귀했고 수준 높은 제작 기술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여기에 크기 경쟁까지 더해 가격 상승을 부채질했다. 갈수록 높고 풍성한 가체가 유행하자 어린 신부가 가체 무게로 목이 부러질 정도였다. 커진 크기만큼 가격은 치솟았다. 실학자 이덕무는 ‘청장관전서’에서 장신구를 포함한 가체 가격이 7만∼8만 전(錢)에 이르렀다고 개탄했다. 이는 초가집 수십 채와 맞먹는 값이었다.

홍현성 한국학중앙연구원 전임연구원
#가체#가체장#조선시대 패션#체발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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