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소한 도서관]바람과 나무, 머무름과 떠돎…‘바람의 사생활’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8월 21일 17시 1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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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과 ‘끌림’의 시인 이병률 씨. 동아일보DB
‘바람’과 ‘끌림’의 시인 이병률 씨. 동아일보DB
‘계집이란 말은 안팎이 잡히는데
그 무엇이 대신해줄 것 같지 않은
사내라는 말은 서럽고도 차가워
도망가려 버둥거리는 정처를 붙드는 순간
내 손에 뜨거운 피가 밸 것 같다

처음엔 햇빛이 생겼으나 눈빛이 생겼을 것이고
가슴이 생겼으나 심장이 생겨났을 것이다
한 사내가 두 사내가 되고
열 사내를 스물, 백, 천의 사내로 번지게 하고 불살랐던
바람의 습관들

되돌아보면 그 바람을 받아먹고
내 나무에 가지에 피를 돌게 하여
무심히 당신 앞을 수천 년을 흘렀던 것이다
그 바람이 아직 아직 찬란히 끝나지 않은 것이다’

-이병률의 시 ‘바람의 사생활’

이병률 씨는 ‘끌림’, ‘바람이 분다 당신이 좋다’ 같은 베스트셀러 에세이로 잘 알려졌지만 그에 앞서 시집 4권을 상재한 시인이다. 에세이 제목에서 솔직하게 드러나듯 그는 ‘바람에 따라’ ‘끌리는 대로’ 나아가는 이다. 시 ‘바람의 사생활’에는 그의 글쓰기의 행로가 잘 드러나 있다.

이 시에는 ‘계집’과 ‘사내’가 등장한다. ‘계집’이라는 단어를 소리 내어 보면 입이 꼭 다물어지는데, ‘사내’라는 말은 입이 벌어진 채로 숨이 흘러나간다. 성차별적 어휘라기보다는, 시적 화자가 ‘사내’라는 단어와 동일시되면서 어느 한 곳에 묶이지 못하고 흘러 떠도는 모습을 상징한다. 햇빛 다음 생겨난 눈빛에는 떠도는 그가 붙잡는 풍경이, 가슴 다음 생겨난 심장에는 떠도는 그가 담아놓는 감정이 맺혀 있다. 그는 바람을 타고 떠돌면서 어느 한곳에 몸을 두지 못하지만, 그 바람은 머물러 뿌리를 내린 나무와 가지에 피를 돌게 한다. 바람과 나무, 머무름과 떠돎은 시 한 편 속에서 이렇게 조화로운 노래가 된다.

김지영 기자 kimj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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