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이진]원기소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8월 1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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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영화 ‘검정고무신’은 1960년대 말 국민학생 기영과 중학생 기철 형제의 궁핍했지만 정겨웠던 일상을 담았다. 3기 15화는 기영이 결혼식에 간 엄마가 카스텔라를 가져오기만을 기다리며 코흘리개 여동생을 돌보는 내용이다. 우는 동생을 달래다 원기소(元氣素) 병을 발견한 기영. 엄마가 평소 동생한테만 아껴 주던 원기소를 한 알 두 알 입에 넣다가 결국 몽땅 먹어버린다. 엄마가 카스텔라가 아니라 비누를 들고 오자 실망한 기영은 원기소 병이 텅 빈 걸 알게 된 엄마의 고함을 피해 집 밖으로 달아난다.

▷40대 후반 이상이라면 원기소의 고소한 맛과 역기를 든 사람 상표를 기억할 것이다. 1954년 판매 허가를 받은 원기소는 그 무렵의 거의 유일한 비타민B 영양제라고 할 수 있었다. 광고문구도 ‘우리는 젖 먹을 때부터 원기소! 발육촉진, 식욕증진, 병에 저항력 강화’였다. 1963년에 새로운 영양제로 삐콤씨와 아로나민이 나란히 선보였지만 원기소 인기는 좀체 식을 줄 몰랐다. 간식거리가 별로 없던 시절 기영이처럼 과자라고 여긴 아이들이 많았을 것이다.

▷식품의약품안전처가 어제 서울약품공업㈜의 원기소 판매를 금지했다. 식욕 부진이나 소화 불량에 효과가 있음을 입증할 수 없다는 이유였다. 하지만 실상은 휴업 상태인 이 회사가 관련 자료를 제출하지 못했던 탓이다. 원기소도 만들지 않은 지 이미 오래됐다. 다만 별개 회사가 2015년부터 판매한 건강기능식품 ‘추억의 원기소’에 불똥이 튀었다. 판매 금지당한 원기소와 혼동한 판매처가 반품하는 등 애를 먹었다고 한다.

▷검정고무신에서는 원기소가 막내 차지였지만 현실에서는 장남이나 외동아들 몫이 될 때가 대부분이었다. 어머니가 숨겨놓고는 장차 집안의 기둥 역할을 할 아들에게 주었다. 영양제까지 ‘선택과 집중’ 방식으로 줘야 했던, 어려웠던 그 시절을 요즘 아이들이 얼마나 이해할까. 나 역시 어머니가 옷장 위에 숨겨둔 원기소 병을 찾아내 한 움큼씩 꺼내 먹었던 기억이 있다. 건드리지 말라던 어머니 말씀을 어긴 것이다. 어머니, 죄송합니다!

이진 논설위원 leej@donga.com
#원기소#비타민b 영양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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