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기획]강진에 수만명 목숨 잃자… 탈출구 필요했던 히데요시 “재침”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7월 2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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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혀진 전쟁 ‘정유재란’<3>

오사카 시의 오사카성(왼쪽)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오른쪽 위)가 유럽의 종교 세력을 끌어들이고 조총과 화약 등 신무기(오른쪽 아래)를 이용해 정유재란을 지휘한 전쟁 지휘소였다. 전성영 사진작가·나고야성 박물관 제공
오사카 시의 오사카성(왼쪽)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오른쪽 위)가 유럽의 종교 세력을 끌어들이고 조총과 화약 등 신무기(오른쪽 아래)를 이용해 정유재란을 지휘한 전쟁 지휘소였다. 전성영 사진작가·나고야성 박물관 제공
일본 간사이(關西) 지방의 최대 도시 오사카(大阪) 시를 상징하는 오사카성.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일본을 통일한 후 절대 권력을 과시하기 위해 지은 성이다. 히데요시는 이 성에서 임진왜란을 기획하고, 또한 정유재란을 명령했다. 기자는 성의 중심부인 천수각에 올라 사방을 둘러봤다. 침략전쟁 지휘부였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아름다운 성이다.

히데요시 당시는 더 화려했다. 1585년 완성된 천수각은 일본 왕이 거주하던 교토(京都)의 고쇼(御所)보다 웅장하고 사치스러웠다. 천수각에서는 성 아래 마을과 저 멀리 요도가와 강까지 굽어다볼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의 오사카성은 히데요시의 작품은 아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히데요시가 지은 성을 완전히 허물고 새로 지었던 성을, 1930년대에 재현한 것이다. 그것도 원형대로가 아니라 콘크리트 재료로 만들었다. 히데요시가 공들여 지었던 5층짜리 천수각도 8층(높이 55m)으로 복원됐다. 다만 천수각 내에 전시된 조립식 황금다실(黃金茶室)은 히데요시가 만든 그대로 남아있다.

‘무적 함대’에 보낸 협박 편지

임진왜란 1년 전인 1591년 가을, 오사카성 천수각의 황금다실.

“내가 탄생할 때에 천하를 통치할 신묘한 조짐이 있었다. 점술가들은 이 전조를 내가 열국을 다스릴 운명을 지니고 있는 것으로 해석했다. 그래서 나는 장년이 된 지 10년이 채 걸리지 않아 일본을 완전히 통일하였다. 이제 대명국(大明國)을 정복하려 하니 이는 내가 원해서가 아니라 하늘로부터의 명령을 따른 것이다.”

황금다실에서 히데요시가 흥겹게 읊어대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히데요시의 책사이자 외교문서 담당관인 사이쇼 죠타이(西笑承兌)가 빠른 손놀림으로 받아 적었다. 미천한 신분 출신인 히데요시는 자기를 과시하고 싶을 때는 늘 어머니의 태몽을 떠벌리곤 했다. 이글거리는 태양이 모친의 가슴으로 들어와 그가 태어났다는 거다. 그는 조선 등 다른 나라에 보낸 국서(國書)에서 스스로를 ‘태양의 아들’이라고 표현했다. 히데요시는 계속 읊었다.

“당신의 나라는 아직 나에 대한 경의의 표시나 조공이 없었다. 내년 봄까지 히젠나고야(肥前名護屋)에 와서 나에게 항복하라. 지체하면 정벌하러 군대를 보낼 것이다.”

스페인령 필리핀 제도장관(諸島長官, 마닐라 총독)에게 보내는 국서(1591년 9월 15일자)였다. 글을 읽을 줄 모르는 히데요시는 받아적은 걸 다시 읽어보라고 한 다음 만족한 표정을 지었다. 히데요시의 국서는 일본이 명나라를 정복하겠다는 뜻을 온 천하에 알리는 행위였다. 그는 진심으로 대륙 정복의 꿈을 가지고 있었고, 스페인도 여기에 협조하라는 협박성 메시지를 보냈다.

히데요시는 사이쇼에게 “수고했소. 차 한 잔 하시오” 하면서 순금으로 만든 찻잔에 차를 따라주었다. 황금다실은 차 도구 일체가 황금으로 제작된 것은 물론 사방이 온통 금박으로 덮인 히데요시의 개인 다실이었다. 히데요시는 극단의 사치를 부리는 걸 즐겨했다. 키가 작고 못생긴 용모로 ‘사루(猿·원숭이)’라는 별명을 들으면서 살아온 데 대한 보상심리였다.

히데요시의 국서를 받은 필리핀령 루손 섬의 스페인 총독 고메스 페레스는 답신을 보냈다.

“스페인은 세계의 많은 나라를 식민지로 만들어 ‘세계에서 가장 위대하고 강한 나라’가 됐다. 그러나 스페인령 필리핀과 일본이 우호적인 관계로 발전시킬 수 있을 것이다.”

스페인 총독은 일본의 위협에 대비하는 한편으로 일본과 거래를 트려고 했다. 그는 전쟁은 곧 큰돈을 버는 기회라는 것을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실제로 조선에서 전쟁이 발발하기 1년 전부터 필리핀 루손 섬은 전쟁 물자를 대느라 바빴다.

조선을 침공하는 선봉장이었던 가토 기요마사는 일본의 국제 무역항 나가사키를 통해 필리핀 루손 섬으로부터 전쟁 물자를 구입했다. 일본에서 생산된 은과 밀을 루손 섬으로 가지고 가서 조총, 실탄, 화약 등으로 바꾸어 왔다. 스페인은 은과 밀을 다시 중국으로 재수출하는 중개무역으로 큰 이득을 취했다.

가토 역시 무역을 통해 은이 돈이자 무기임을 알아차렸다. 가토는 조선을 침략했을 때 조선의 철령을 넘어 함경도까지 달려갔다. 함경도 단천의 질좋은 은광을 확보하기 위해서였다. 가토는 은을 캐 히데요시에게 진상하면서, 계속 은광을 개발해 전비에 보태겠다고 보고했다. 그러나 명군이 빠르게 남하하는 바람에 가토는 별 재미를 못보고 후퇴했다. 무역에 맛을 들인 그는 정유재란이 끝나고서도 베트남, 태국과의 교역을 통해 돈을 벌었다.

한편 스페인 총독은 히데요시의 협박을 일본 진출의 지렛대로 삼았다. 프란치스코 수도회 수사들을 사신(使臣)의 자격으로 일본에 파견하는 등 은밀히 일본에서 세력 확장을 꾀했다.

정유재란 발발 불과 2개월 전인 1596년 12월, 결국 사달이 났다. 유럽 남만인(南蠻人)들이 종교적, 경제적 면에서 일본을 심각하게 위협한다고 판단한 히데요시는 본보기로 26명의 선교사(스페인 수사 및 포르투갈 신부)와 신자들을 처형했다. 무역항인 나가사키에 이들의 시신이 십자가에 걸렸다. 이 순교는 유럽에도 알려져 파문을 일으켰다. 네덜란드, 영국 등 후발 강국들이 동아시아에 이목을 집중하는 계기가 됐다. 1597년 정유재란이 발생했을 때 포르투갈이 조명(朝明)연합군 편에 서서 ‘해귀’라는 특수병까지 조선에 파견한 것도 이 사건과 무관치 않을 것으로 추정된다.

서방 종교와의 음험한 거래

서양인 최초로 한국 땅을 밟은 선교사 그레고리오 데 세스페데스를 기념하는 ‘세스페데스 공원’(창원시 소재·위쪽 사진). 임진왜란 때 세스페데스가 활동한 웅천왜성터. 현재는 성벽 정도만 남아 있다. 창원=박영철 기자 skyblue@donga.com
서양인 최초로 한국 땅을 밟은 선교사 그레고리오 데 세스페데스를 기념하는 ‘세스페데스 공원’(창원시 소재·위쪽 사진). 임진왜란 때 세스페데스가 활동한 웅천왜성터. 현재는 성벽 정도만 남아 있다. 창원=박영철 기자 skyblue@donga.com
조선 침공을 위해 유럽 열강을 끌어들이려는 히데요시의 책략은 훨씬 더 이전부터 시작됐다. 임진왜란 발발 6년 전인 1586년 3월 16일, 벚나무 꽃이 흐드러지게 핀 오사카성에서 히데요시는 일단의 외국인 손님들을 맞이했다.

“조선과 중국을 정복하는 데 배가 필요하오. 성능이 뛰어난 포르투갈 나우선(Nau船) 2척과 항해사 2명을 주선해 주시오. 그렇게만 해주면 점령지에다 교회를 세우게 해주겠소.”(‘日本キリスト敎史’)

포르투갈 예수회 신부들의 통역을 맡은 선교사 루이스 프로이스는 히데요시의 느닷없는 제안에 잠시 당황했다. 프로이스를 통해 이 제안을 들은 일본 예수회 선교 책임자 가스파르 코엘류는 일행들과 의논하기 위해 잠시 시간을 달라고 했다.

“좋습니다. 일본 규슈(九州) 교구의 기리시단(크리스천) 다이묘들이 모두 간파쿠(關白)님의 뜻을 받들도록 해드리겠습니다. 중국 원정에 나서면 포르투갈의 배와 무기를 구입하도록 주선하겠으며, 필요하면 포르투갈 군대도 동원할 수 있을 것입니다.”(‘キリツタソ史考’)

규슈 교구에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던 코엘류는 결국 히데요시가 내민 손을 잡았다. 정치와 종교의 은밀한 거래가 이뤄졌다. 히데요시는 조선과 중국을 치기 위해 유럽을 이용하려 했다. 히데요시는 대군을 효과적으로 실어 나르기 위해 적재량 2000t 규모의 원양선을 원했으나 이뤄지지는 않았다. 대신 기리시단 다이묘와 병사들이 전쟁에 대거 동원됐다. 정유재란때 순천왜성을 지휘한 고니시 유키나가, 사천왜성을 지휘한 시마즈 요시히로 등이 규슈의 대표적인 기리시단 장수들이었다. 1579년 기준으로 이미 10만 명을 넘어선 일본인 기리시단(발리나뇨 보고서) 중 상당수가 전쟁에 참전했다.

임진왜란 2년째인 1593년에는 오사카의 예수회 수도원장 세스페데스가 직접 조선까지 들어왔다. 스페인 출신인 그는 고니시의 진영인 웅천왜성(창원)을 근거지로 삼아 1년간 머물면서 왜군들과 조선인 포로들에 대한 진중(陣中) 포교에 힘썼다.

세스페데스는 한국 땅을 밟은 최초의 가톨릭 선교사로 기록된다. 그런 그가 420여 년이 지난 2017년 현재 경남 창원에서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다. 창원시가 지난해 2월 조성한 ‘세스페데스 기념공원’ 때문이다. “왜군을 위한 종군신부를 기리기 위해 공원까지 조성한 것은 지나치다”라는 주장과 “전쟁의 참상과 조선의 존재를 유럽에 최초로 알린 신부라는 점에서 기념할 만하다”라는 주장이 팽팽히 맞서고 있다. 정치와 종교의 잘못된 만남이 420여 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갈등을 빚고 있는 것이다.

지진으로 흉흉한 민심을 조선 침공으로 돌려라

“사루(원숭이)가 나라를 잘못 다스려 지진과 홍수가 그치지 않는다.”

1592년 임진왜란이 시작되고 이듬해인 1593년부터 4년간 끌어온 명나라와 일본과의 지루한 강화협상이 막바지로 치닫던 1596년 여름, 오사카성의 민심은 흉흉했다. 그해 여름은 천재(天災)로 일본이 몸살을 앓았다. 윤 7월 18일 밤, 기나이(畿內) 일대에서 발생한 대지진(규모 7.0)은 일왕이 사는 교토는 물론 히데요시의 은거지인 후시미(伏見)성에 큰 피해를 남겼다. 오사카성도 무사하지 못했다.

지진은 열흘이나 계속돼 깔려 죽은 사람들이 수만여 명에 이르렀다(‘고대일록’). 시신을 화장하는 연기가 멈추지 않았다. 도난과 약탈마저 횡행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8월에는 100년 만의 대홍수가 발생했다. 사람들은 먹을 것이 없어 서로를 잡아먹기까지 했다. 아비규환의 생지옥이었다.

히데요시의 정치적 기반인 오사카와 교토 사람들 사이에서도 자연재해를 그의 탓으로 돌리는 분위기가 팽배했다. ‘지진은 앞으로 병란(兵亂)이 일어나 왕과 장수를 망하게 하는 징조’라거나 ‘히데요시의 목숨줄이 몇 년 남지 않았다’는 참언까지 나돌았다. 당시 일본에 붙잡혀 있던 강항(姜沆)은 ‘간양록’에서 “적괴(賊魁·히데요시)의 흉악한 행위들이 차고 넘쳐 결국 천지의 괴기(乖氣)를 불러들였다”고 기록했다.

히데요시는 탈출구를 찾아야 했다. 명과의 강화협상 결과 허울뿐인 일본 국왕 책봉식(1596년 9월 1일)을 오사카성에서 치르긴 했으나, 명으로부터 조선 남부에 대한 지배권을 인정받지 못했다. 오히려 조선에 남아 있는 왜군들을 무조건 철수시키라는 요구만 받았다. 히데요시는 성과없는 전쟁 책임을 피하기 위해서도, 정권 유지마저 어렵게 하는 지진의 공포에서 탈출하기 위해서도 조선 땅이 필요했다. 조선에서 전쟁을 치른 부하들 말로는 조선은 지진으로부터 안전한 곳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1596년 오사카성에 겨울이 왔다. 히데요시는 자신에게 겨누는 비난을 외부로 돌리기 위해 조선 재침을 결정했다. 자연재해라는 위기 상황이 히데요시가 명분도 없는 정유재란의 방아쇠를 당긴 한 원인으로 작용했던 것이다(‘豊臣政權期에 있어서 자연재해와 대외관계’). 학살과 약탈로 점철된 정유재란의 주범 히데요시는 결국 전쟁이 가장 치열한 국면으로 치닫던 1598년 8월 환갑을 갓 넘긴 나이에 사망했다. 지진 참언대로 그의 후계자(히데요리) 역시 오사카성에서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오사카성은 계절이 바뀔 때마다 조선인이 겪은 아픈 기억을 떠올리게 하는 곳이다.

오사카=안영배 전문기자 ojong@donga.com
#정유재란#오사카성#도요토미 히데요시#임진왜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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