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복도로 곳곳 ‘문화 마을’… 시련 딛고 선 억척의 도시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4월 2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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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성하 전문기자의 코리안 지오그래픽]‘피란수도’ 부산 역사기행

1세대 다큐멘터리 사진가 최민식의 카메라로 기록된 ‘1960년 부민동’ 판자촌 모습(최유진 씨 제공), 작은 사진은 최근 촬영한 아미비석문화마을 근방의 산복동네. 부산=조성하 기자 summer@donga.com
1세대 다큐멘터리 사진가 최민식의 카메라로 기록된 ‘1960년 부민동’ 판자촌 모습(최유진 씨 제공), 작은 사진은 최근 촬영한 아미비석문화마을 근방의 산복동네. 부산=조성하 기자 summer@donga.com
《부산이 한때 대한민국 수도―그것도 두 차례―였음을 아는 분, 열 중 여섯에 불과하다.(부산발전연구원 조사) 최초의 화폐개혁(1953년), 최초의 내각책임제 개헌(1951년)이 이뤄진 곳 역시 부산임을 아는 이는 더 적을 것이고. 어쩌면 그게 더 자연스럽다. 모두 전쟁 중 벌어진 일이니. 그렇지만 부산여행에 재미를 더하고 싶다면 반드시 알아야 할 역사이고 사건이다. ‘피란수도’ 부산에서 이뤄진 그 특별한 역사를 알지 못하는 한 대한민국 어떤 도시에서도 느끼거나 볼 수 없는 부산의 독특함을 이해할 수 없어서다. 산복도로가 통과하는 아미동 비석마을과 임시수도기념관 같은. 오늘은 그 ‘피란수도’ 부산을 엿보러 나선다.》
 
부산역 앞에서 오른 투어버스. 그 이름이 재미있다. ‘부산여행특공대’다. 안내를 맡은 이는 이 회사 손민수 이사(40). 일본여행 가이드 경력의 부산 토박이다. 그런데 회사 이름과 그의 복장이 상통한다. 군화에 얼룩무늬 점퍼 차림인데 호칭도 그렇다. ‘손 반장’이라 불러달란다. 여행특공대를 이끄는 리더라는 의미인데 그렇다면 나처럼 이 버스에 오른 관광객은 ‘특공대원’? 처음엔 어리둥절했다. 하지만 투어가 끝날 즈음엔 고개가 끄덕여졌다. 특수전을 수행하는 부대원처럼 부산의 특별한 역사 현장만 샅샅이 누비고 다녀서다.

1950년 6월 25일. 남침한 인민군은 그야말로 파죽지세였다. 그런 전황으로 수도는 대전으로, 대구로, 종국엔 부산으로 이전(8월 18일)됐다. 도발 석 달도 채 되지 않아서다. 그즈음 미군과 유엔군이 당도했다. 부산항을 통해서다. 최후 저지선 낙동강은 이렇게 사수됐고, 그새 벌인 인천상륙작전(9월 15일)이 전세를 역전시켰다. 이어 평양이 함락됐고 연합군은 기세등등하게 압록강, 두만강까지 진격했다. 그러나 이듬해 첫날 중공군의 개입으로 상황은 다시 역전됐다. 아군의 퇴각으로 서울 재함락(1월 4일)과 동시에 ‘1·4후퇴’가 시작됐다. 그래서 부산은 또다시 임시수도가 됐다. 1·4후퇴 하루 전부터 휴전협정 체결(1953년 7월 27일) 직후까지. 이렇게 부산은 6·25전쟁 중 두 차례 총 1023일간 대한민국의 수도였다.

당시 서울에 있던 입법(국회) 사법(검찰청과 법원) 행정(각 부처) 3부가 이승만 대통령 관저와 함께 부산에 옮겨왔다. 마땅한 거처가 있을 리 없었다. 그래서 대통령은 경남도지사 관저(1926년 준공)에, 행정부는 경남도청(1925년 준공)에, 국회는 부산극장에 들어갔다. 지금의 대청로 일대다. 부산여행특공대는 그 몇 곳을 들렀다. 경남도청은 현재 동아대 석당박물관이고, 대통령 관저는 당시 모습 그대로 ‘임시수도기념관’(옛 검사장 관사)과 함께 볼 수 있다. 피란수도 당시 모습을 담은 사진 등이 실내에 전시 중이다. ‘천막학교’도 마당에 재현해 두었다.

물차가 오기만을 기다리며 길게 줄세운 물통에서 산복동네(남부민동) 주민의 고단한 삶이 옅보인다. 1968년 동아일보 보도 사진.
물차가 오기만을 기다리며 길게 줄세운 물통에서 산복동네(남부민동) 주민의 고단한 삶이 옅보인다. 1968년 동아일보 보도 사진.
하지만 피란수도의 모습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건 따로 있다. 산복도로(산허리를 가로지르는 길)와 ‘40’ ‘168’ 등 숫자 이름이 붙은 계단의 산동네다. 부산에서 계단 오르기란 일상이다. 다닥다닥 붙여 지어 온 산을 뒤덮다시피한 산동네 피란마을의 혈맥이자 숨통이어서다. 부산은 지명 그대로다. 온 천지가 ‘산(山)’이다. 누구는 48%, 누구는 70%라고 한다. 항만을 낀 도심은 평지지만 대부분이 매립지. 산을 잘라 바다에 쏟아부어 어렵사리 조성한 인공의 땅이다. 이렇듯 평지가 귀한 부산인데 거기에 그 어디보다도 많은 사람이 몰렸다. 그것도 일시에 광복과 전쟁 두 차례나. 피치 못할 지정학적 숙명이라 할 수밖에.

1945년 광복 때는 100만 해외동포가 부산항으로 돌아왔다. 6·25전쟁 중엔 피란민 중 40만 명이 부산에 보따리를 풀었다. 인구는 광복 당시 28만 명에서 정부 수립(1948년) 때 50만, 6·25전쟁 중엔 88만, 휴전 후엔 110만 명이 됐다. 부산은 이미 수용능력의 두 배를 넘긴 상태였다. 피란민을 위해 ‘방 하나 내어주기 운동’도 벌어졌다. 하지만 태부족. 그래서 피란민 스스로 거처를 마련했는데 어디든 가리지 않았다. 다리 밑이고 산등성이고. 그게 감천문화마을이고 영주동·영도섬의 산동네 절벽 마을이다. 부산 남항과 북항, 낙동강 하구변의 사하구로 이어지는 산복도로의 산등성이 판잣집으로 덮인 건 그때. 지금이야 산복도로가 있어 오가기 편하다. 그러나 그게 놓인 1960년대 전엔 물지게든 똥지게든 가파른 계단으로 지고 오르내렸다. 천마산 금호아파트 근방의 ‘500계단’이 당시 수고를 말해준다. 어떤 산동네든 대략 이만큼의 계단은 오르내렸어야 했을 것이다.

드러난 상석이 묘지 위에 지은 집임을 확인시켜 주는 아미동 피란민 주택. 그 옆은 부산여행특공대의 ‘손반장’ 손민수 이사.
드러난 상석이 묘지 위에 지은 집임을 확인시켜 주는 아미동 피란민 주택. 그 옆은 부산여행특공대의 ‘손반장’ 손민수 이사.
손 반장의 여행특공대는 이 중 아미비석문화마을을 찾았다. 위치는 천마산 등성의 감천문화마을 반대편 산기슭(서구 아미동). 그 이름은 일제강점기에 부산 거주 일본인의 공동묘지(1913년 조성)에서 왔다. 묘지는 더없이 훌륭한 집터였다. 상석은 축대와 바닥이 됐고 비석은 기초와 기둥이 됐다. 지붕은 루핑지(Roofing紙·미군부대에서 흘러나온 군수품 박스의 골판지를 펴고 도로포장용 타르를 발라 만든 방수 종이)로 이었는데 이슬만 피해도 행복했다. 아미동 비석마을엔 아직 그런 집이 있다. 물론 내·외부를 손봐 살기는 좋아졌다. 그래도 마주치면 양편 모두 모로 비켜서야 지날 좁은 골목이 미로처럼 동네를 비집거나 한 뼘이라도 살림방을 넓히느라 2층을 1층보다 내어 지은 ‘가분수 집’은 여전하다.

손 반장은 비석과 상석이 드러난 당시 집과 골목으로 특공대원을 안내하며 보여주고 설명했다. 비석마을의 ‘아미문화학습관’에도 들렀다. 여기선 피란마을의 당시 모습을 볼 수 있다. 전쟁 중과 직후 그 고단한 삶을 촬영한 ‘빈민의 사진가’ 최민식(1928∼2013) 갤러리에서다. 황해도 출신의 실향민인 그는 독학으로 사진가가 되어 인간의 모습을 다큐멘터리처럼 사진에 담았는데 그게 수만 점에 이른다.

이런 마을이 부산엔 지금도 도처에 남아 여전히 주거공간으로 기능하고 있다. 아니 이젠 ‘전국구’라 할 만하다. 휴전 후 일어난 베이비붐과 1970년대 고도성장으로 촉진된 도시화, 그로 인해 생겨난 도시빈민 주거 현장인 달동네의 원형이자 모델이 되어서다. 이 산동네가 여행자에게도 낯설지 않은 것은 그 때문이다. 그나마 달동네는 나은 편이다. 집집에 화장실이라도 갖췄으니. 피란마을엔 공동화장실이 전부였다. 심지어 한 지붕 아래 통로도 없이 벽 일부만 뚫어 오가던 방 세 칸(7명씩과 5명의 세 가구 19명 거주) 집도 있었다. 맨 안쪽 거주자는 늘 다른 두 가구의 살림방을 지나 출입해야 했다. 우암동 소막마을(남구)은 일제강점기에 바닷가에 둔 검역소 우사(牛舍)를 고쳐 살던 곳이다. 영도 흰여울문화마을은 부산남항이 조망되는 해안 절벽에 있다. 이런 독특한 모습으로 ‘변호인’ 등 영화에도 등장했다.

원산에서 월남한 소설가 이호철은 타계(2016년) 2년 전 이렇게 소회했다. “피란 와서 며칠간 머무르던 피란민 임시수용소에서 나올 때 손에 쥐여주던 지금 돈 3만∼4만 원과 피란민증, 아무 곳이나 거처를 정해도 좋다는 자유로운 허가는 결코 잊을 수 없는 따뜻한 부산의 기억으로 남았다.”

그렇다. 부산은 전쟁과 피란이라는 시련에도 굴하지 않고 산복도로와 항구라는 새로운 문명지대를 스스로 창조해낸 억척의 도시다. 동시에 피란민에게는 새로운 집단의식을 형성시켰다. ‘우리가 넘이가(남인가)’라는. 20세기 냉전시대의 상징으로 기억되는 6·25전쟁. 부산은 그 쓰라린 유산을 가장 확실하게 보존해온 도시다. 그래서 ‘피란수도 부산’은 반드시 세계유산에 등재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걸 실현시킬 가장 훌륭한 수단, 그건 우리 국민 모두의 피란수도 부산여행이다.

부산에서 조성하 전문기자 summer@donga.com
 
※여행 정보

피란수도 부산여행:
부산여행특공대의 반나절 투어버스 이용을 권한다. 짧은 시간에 저렴한 비용으로 생생하게 유적을 확인하고 설명을 들을 수 있는 효과적인 수단이다. 부산역∼영도대교(다리 올라가는 장면 관람)∼임시수도기념관∼아미동 비석마을∼천마산로 전망대∼최민식 갤러리∼부산역. 요금은 2만5000원(초등생 이하 1만5000원). 부산역 4번 출구 앞에서 매일 오전 9시 50분과 오후 1시 20분 두 차례 출발한다. 종료 시간은 각각 낮 12시 반, 오후 5시. 070-4651-4113, www.busanbustour.co.kr, 페이스북 busansonbanjang

축제: ◇2017 조선통신사축제: 5월 6일 2000명이 참가하는 조선통신사 행렬(오후 2시반∼6시·용두산공원∼자갈치교차로)과 드림콘서트(오후 6시·용두산공원)가 볼거리. www.tongsinsa.com ◇낙동강 자전거 페스티벌: 6월 17일 낙동강문화관∼을숙도생태공원∼맥도생태공원 왕복. 한국수자원공사 주최. 참가 신청은 5월 말까지. nakdongbike@waterway.or.kr, 051-292-1042

부산관광공사: 시티투어버스, 이달의 가볼 만한 곳 등 모든 부산관광정보가 홈페이지(www.bto.or.kr)에 있다.

맛집: ◇동림갈비: 초량 산복도로 아래 초량전통시장 내 돼지갈비골목 2층. 과거에 도축장을 중심으로 형성된 부두노동자 상대 돼지고기 전문식당 중 하나. 051-468-2115 ◇하연옥(대연점): 쇠고기 육전을 채쳐 올린 뒤 해물 육수를 부어 내는 진주식 냉면. 진주에 본점이 있다. 남구 유엔로 214. 051-623-2777

찾을 곳: ◇최민식 갤러리: 서구 천마산로 410 아미문화학습관 2층. 토성역에서 걸어서 15분, 감천문화마을에서 걸어서 10분 소요. 051-240-4495 ◇임시수도기념관: 입장 무료. 월요일 쉼. 부산지하철1호선 토성역 2번 출구. 서구 임시수도기념로 45. monument.busan.go.kr, 051-244-6345 ◇KISWIRE센터: 향토기업 고려제강(KISWIRE)이 공장 터(수영구 구락로 123번길 20)에 특별한 건축으로 조성한 홍보관. 기둥과 보 없이 오직 철제 와이어만으로 지탱하는 특이한 구조다. 부산비엔날레 전시장으로도 쓰이는데 옛 공장을 개조해 기계로 장식한 커피숍 ‘테라로사 수영점’도 명물.
#부산#피란수도#부산 역사기행#부산여행특공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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