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의 향기]‘영웅’의 몰락… 얼굴없는 테러戰의 시대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4월 2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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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편화한 전쟁/헤어프리트 뮌클러 지음/장춘익 탁선미 옮김/476쪽·2만2000원·곰출판

전쟁의 역사는 ‘전쟁 범죄’와 궤를 같이한다. 2400여 년 전 펠로폰네소스 전쟁을 앞두고, 당시로서는 충격적인 전쟁 범죄가 벌어졌다. 스파르타가 아테네 영토의 올리브 나무를 베어버린 것. 열매를 맺기까지 10년 이상 걸리는 올리브 나무를 자른다는 것은 생활 터전을 파괴시킨다는 뜻이었다. 이 같은 전쟁 범죄는 아테네와 스파르타 몰락의 한 원인이 됐다는 주장도 있다.

2017년 4월, 양상은 다르지만 세계는 충격적인 전쟁 범죄에 경악했다. 4일 시리아 정부군이 치명적인 독가스로 알려진 사린가스를 투하해 어린이 포함 87명의 목숨을 앗아갔다. ‘전쟁에도 규칙이 있다’는 정형화된 틀로는 인류와 함께해 온 전쟁의 본질을 바라볼 수 없다는 게 이 책의 논지다.

저자는 독일 훔볼트대 정치학 교수로 독일 내에서 전쟁 문제에 관해 ‘움직이는 1인 싱크탱크’로 불리는 전쟁 전문가다. 이 책은 인류 역사상 가장 큰 규모의 전쟁이었던 1, 2차 세계대전부터 이슬람국가(IS), 시리아 내전, 크림 반도 사태 등 현재에도 진행 중인 갈등까지 인류가 겪은 전쟁과 그 피해 양상을 꼼꼼하게 복기했다. 단지 기록의 나열이 아니라 전쟁과 관련한 문학 작품 등 다양한 자료를 함께 곁들여 읽는 맛을 더한다.

저자가 꼽는 현대 전쟁의 가장 큰 규칙 변화는 ‘영웅’의 몰락이다. 2차 세계대전까지만 하더라도 국가주의에 사로잡힌 독일의 나치와 공산주의 체제 신봉에 국민을 부속품처럼 여긴 옛 소련처럼 영웅화된 국가가 주류를 이뤘다. ‘전쟁을 불사하는’ 국가가 지배했던 이 시기까지 한 국가를 파멸시킬 정도의 국가 간 전쟁이 빈번하게 일어났다.

반면 20세기 중후반부턴 성숙한 시민권, 지나치게 비중이 커져버린 산업자본 등의 영향으로 영웅 문화가 사라졌다. 전쟁의 양상도 달라졌다. 6·25전쟁과 베트남전쟁처럼 체제 대립의 성격을 띤 일부 전쟁을 제외하곤 국가들이 정면으로 부딪치는 전통적인 전면전이 사라진 것. 전쟁을 하는 게 ‘남는 장사’가 아니라고 판단한 국가들의 당연한 선택이라는 것이다.

문제는 영웅주의가 여전히 남아 있는 사회가 존재한다는 점이다. 신의 이름으로 성전(聖戰)을 벌인다는 IS, 부족주의 전통이 남아 있는 아프리카 등처럼 말이다. 정상국가에 비해 전력에서 약세인 이들이 택한 방식은 테러다. 선전포고나 외교적 수단도 필요 없다. 서구 민주주의의 상징인 영국 국회의사당이나 미국 자본주의의 자신감이던 세계무역센터를 대상으로 끔찍한 테러가 일어난 이유라고 말한다.

“전쟁은 카멜레온처럼 환경에 따라 적응한다”는 것이 저자의 결론이다. 과거와 같이 국가 단위로 맞붙는 대규모 전쟁은 사라질 수도 있다. 그러나 민간 군사회사에 의해 자행되는 민영화된 전쟁, 테러와 대규모 화학무기가 사용되는 전쟁 폭력의 비대칭화, 그리고 군인이 아닌 민간인의 피해가 늘어나는 전쟁의 탈군사화 등 현대 전쟁은 더 교묘해진 형태로 지속될 것이라는 것이 저자의 예측이다. 그래서 전쟁을 막겠다는 기존의 방식에서 벗어나 늘 새로운 형태의 전쟁에 대비해야 한다고 저자는 주문한다.

세계 유일의 휴전 국가인 우리나라는 전쟁에 늘 민감할 수밖에 없다. 전쟁에 관한 새로운 관점을 던져주는 이 책이 튼튼한 안보를 꿈꾸는 우리 사회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유원모 기자 onemore@donga.com
#파편화한 전쟁#헤어프리트 뮌클러#테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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