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지 마세요”…3년 만에 떠오른 세월호, 미수습자 9명의 안타까운 사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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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7년 3월 23일 15시 5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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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년 만에 떠오른 세월호

사진=동아일보DB
사진=동아일보DB
세월호가 차디찬 바다로 가라앉은 지 약 3년 만에 수면 위로 떠올랐다. 2014년 4월 16일 이후 1073일째 돌아오지 못한 가족을 기다리고 있는 미수습자 9명의 가족들은 애타는 심정으로 또 다시 기다림의 시간을 견디고 있다.

세월호 참사 당시 탑승객 476명 중 구조된 인원은 172명. 295명이 숨졌고 9명은 시신조차 찾지 못했다. 가족의 품으로 돌아오지 못한 미수습자 9명은 단원고 2학년 1반 조은화 양, 2학년 2반 허다윤 양, 2학년 6반 남현철·박영인 군과 단원고 고창석·양승진 선생님, 권재근 씨와 혁규 부자, 그리고 이영숙 씨다.

조은화 양은 전교 1등을 도맡아 하던 우등생이었다. 회계 분야를 담당하는 공무원이 꿈이었다. 늘 엄마가 걱정할까 ‘버스에 탔다’ ‘어디를 지났다’ ‘학교에 도착했다’는 문자를 자주 보냈고, 집에 돌아오면 학교에서 있었던 일을 조목조목 얘기하는 한없이 다정했던 딸이었다.


희귀병인 신경섬유종을 앓고 있는 어머니를 둔 허다윤 양은 가정 형편을 알기에 용돈을 달라거나 무언가 사달라고 조르는 적 없었던 착한 딸이었다. 3년 전 수학여행 길에 오르면서 아버지의 검정 모자가 마음에 든다며 그 모자를 빌려 가던 것이 마지막 모습이 됐다. 유치원 선생님이 꿈이었던 다윤 양은 중학교 때부터 유치원이나 어린이집에 가서 아이들을 돌보는 봉사활동을 열심히 해왔다. 수학여행 전 다윤 양 가족은 가족사진을 찍었고, 하필 2014년 4월 16일이 사진관에서 사진을 찾기로 한 날이었다.

박영인 군은 만능 스포츠맨이었다. 야구경기를 시청하던 아버지 옆에는 늘 영인 군이 있었고, 종종 경기장에 함께 관전을 하러 가기도 했다. 부모와 여행 다니는 걸 좋아해 어머니 김선화 씨 휴대전화의 사진첩에는 셋이 찍은 가족사진이 가득했다. 어머니는 영인이가 갖고 싶어 한 건 다 사줬지만 유독 축구화만큼은 사주지 못했다고. 팽목항에는 어머니가 산 축구화가 놓여있다.

팽목항엔 남현철 군을 기다리는 기타도 놓여져 있다. 음악적 재능이 뛰어난 현철 군은 기타 실력이 상당했고, 작사 실력도 남달랐다. 5반 고(故) 이다운 군의 자작곡 ‘사랑하는 그대여’의 노랫말은 현철 군의 작품이다. “사랑하는 그대 오늘 하루도 참 고생했어요 / 많이 힘든 그대 힘이든 그댈 안아주고 싶어요 / 지금쯤 그대는 좋은 꿈 꾸고 있겠죠 / 나는 잠도 없이 그대 생각만 하죠 / 그대의 어깨를 주물러주고 싶지만 항상 마음만은 그대 곁에 있어요.”(‘사랑하는 그대여’ 가사 中)

단원고 고창석 교사의 마지막 모습은 세월호 사고 당시 객실 곳곳을 뛰어다니며 제자들에게 구명조끼를 챙겨주고 “빨리 나가라”면서 탈출을 돕는 모습이었다. 체육교사인 고창석 교사는 늘 정장에 넥타이를 했다. “운동복을 입고 출근하지 그러냐”는 사람들에게 “체육도 학문이고 절대 가볍지 않다”고 답했다. 제자들은 그를 고슴도치 머리의 ‘또치쌤’이라며 따랐다. 그는 다정한 남편이기도 했다. 매년 아내의 생일과 결혼기념일에 사무실로 꽃바구니를 보냈다. 아내는 남편이 대학생 때 바다에서 인명구조도 했고 수영을 잘했다며, 사고 당일에도 제자들을 구하느라 가장 늦게 나왔을 거라고 말했다.

단원고 인성생활부장 양승진 교사는 오전 6시 40분이면 출근해 하얀 장갑을 끼고 호루라기를 불며 학생들을 지키던 ‘단원고 지킴이’였다. 그는 학교 뒷산 주말농장에 사과나무도 심고, 천년초도 키웠는데, 이를 팔아 ‘천년초 장학금’을 만들어 형편이 어려운 제자들을 도와주려고 했다. 세월호가 인양되고 있는 23일은 양승진 교사 부부의 결혼기념일이다. 다음날인 24일은 양승진 교사의 생일이다.

권재근 씨(52)는 베트남 출신 아내 한윤지 씨(29), 아들 혁규 군(6), 딸 지연 양(5)과 함께 감귤농장을 운영하기 위해 제주로 귀농하던 길이었다. 가족 중 한 씨만 시신이 발견됐고 권 씨와 아들은 실종 상태다. 유일하게 생존한 지연 양은 친가에서 돌보고 있다. 권재근 씨의 친형 권오복 씨(63)는 가족을 찾겠다는 일념으로 생업을 접고 11m²의 작고 추운 컨테이너 박스에서 생활하며 사고 해역 근처를 지켜왔다.

16년 전 남편과 사별한 이영숙 씨는 아들과 제주도에서 살기 위해 인천에서 제주로 짐을 싣고 가던 중이었다. 이 씨는 남편 사망 후 생계 때문에 아들과 떨어져 살았다. 사춘기 아들은 그게 싫어 ‘엄마’라고 부르지 않다가 몇 년 전에야 다시 “엄마”라고 불렀다. 부산에서 일하는 아들은 제주로 파견을 올 예정이었고, 이 씨는 아들과 함께 제주 올레길을 걸을 꿈을 꿨지만 안타깝게 변을 당했다.

동아닷컴 디지털뉴스팀 기사제보 dnew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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