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기획]“5형제 힘 합쳐 ‘작품’ 한번 만들어 봐야죠”

  • 동아일보
  • 입력 2016년 10월 2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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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산 명물 ‘축구 5형제’ 어떻게 지내시나요

대한민국 최다인 5형제가 축구선수로 활약한 ‘유 씨 형제들’이 16일 큰형 유동춘 군산제일고 감독 둘째 딸 결혼식에 참석해 공을 들고 활짝 웃고 있다. 왼쪽부터 동기 동관 동춘 동옥 동우 씨. 이들은 ‘군산 5형제 축구교실’을 만들어 대한민국 축구 꿈나무를 키울 프로젝트를 가동했다. 원대연 기자 yeon72@donga.com
대한민국 최다인 5형제가 축구선수로 활약한 ‘유 씨 형제들’이 16일 큰형 유동춘 군산제일고 감독 둘째 딸 결혼식에 참석해 공을 들고 활짝 웃고 있다. 왼쪽부터 동기 동관 동춘 동옥 동우 씨. 이들은 ‘군산 5형제 축구교실’을 만들어 대한민국 축구 꿈나무를 키울 프로젝트를 가동했다. 원대연 기자 yeon72@donga.com
 16일 서울 강남구 신사동 한 결혼식장. ‘풍운아’ 이회택 전 대한축구협회 부회장과 김호 용인 FC 총감독 등 한때 한국 축구를 사로잡았던 ‘올드 스타’들이 총출동했다. 유동춘 전북 군산제일고 감독(63)의 둘째 딸 결혼을 축하하기 위해서 모인 것이다. 이들은 동춘 씨와 악수를 한 뒤 나란히 서 있는 동관 씨(53·위덕대 감독)와 동우 씨(49·우석대 감독), 동기 씨(46·기업은행 군산지점 부지점장), 동옥 씨(41·군산 구암초교 감독) 등 동생들과도 활짝 웃으며 인사했다. 동생들도 모두 잘나가는 축구선수 출신이라 잘 알고 있었다. 이들 5형제도 조카 결혼 같은 집안의 큰일이 없으면 거의 모이지 못한다. 이번 결혼식이 형제들은 물론이고 대한민국을 빛낸 축구 선배들을 만날 수 있는 기회였던 셈이다.

1990년 11월 16일자 동아일보에 소개된 ‘군산의 명물 축구 5형제’ 스토리.
1990년 11월 16일자 동아일보에 소개된 ‘군산의 명물 축구 5형제’ 스토리.
 이영무(고양 자이크로 FC 고문), 박창선, 조영증(한국프로축구연맹 심판위원장) 등 한국을 대표했던 선수들과 함께 태극마크를 달고 녹색 그라운드를 누볐던 동춘 씨는 사실 일반인들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았다. 하지만 유 감독을 포함한 형제들은 국내 최초의 ‘5형제 축구선수’로 한때 지명도가 높았다. 1990년 11월 16일자 동아일보엔 ‘군산의 명물 축구 5형제’란 제목으로 이들을 소개하는 기사가 실렸다. 당시까지 4형제가 축구를 했던 김정남 한국OB축구협회 회장 형제(김강남 김성남 김형남)가 이색 축구 가족으로 알려졌지만 5형제가 알려지면서 국내 최대 축구 가족으로 이름을 날린 것이다. 한때 군산에서 ‘축구하는 유씨 댁’ 하면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5남 1녀 중 여자인 둘째 빼고 다 축구선수로 활약했다.

 또래보다 늦게 시작했지만 역대 최연소 국가대표가 된 동춘 씨의 활약상이 형제들을 자연스럽게 축구로 인도했다. 동춘 씨는 ‘동네축구’를 하다 서울 한양중으로 편입해 정식으로 유니폼을 입었을 정도로 출발은 늦었지만 1970년대 중반부터 10년 가까이 대표선수로 활약하는 등 뛰어난 기량을 과시했다.

 한마디로 동춘 씨는 축구 천재였다. 군산남중 시절 당시 지역 축구 영웅 고 채금석 선생의 지도를 받았다. 채 선생은 1930년대 ‘군산 오토바이’란 별명으로 유명했던 군산 축구의 대부. 이분을 기려 ‘금석배’란 축구대회가 군산에서 열리고 있다. 축구부가 없어 혼자 공을 차고 노는 동춘 씨의 실력을 보고 채 선생이 지도해 준 것이다. 채 선생은 당시 공을 잘 차는 아이들을 모아서 무료로 축구를 지도해 서울로 보냈다.

 동춘 씨는 중3 때 서울 한양중에서 테스트를 받았다. 선수 출신이 아니라 다시 3학년으로 1년 더 다녀야 했지만 그는 바로 두각을 나타냈다. 고등학교부터 청소년 대표로 활약했다. 청소년 대표로 활약하던 한양공고 3학년 때인 1972년 서울운동장에서 국가대표팀과의 평가전에서 골을 넣어 1-0으로 이기면서 주목을 받았다. 바로 당시 고려대 1학년으로 만 19세인 차범근 전 수원 삼성 감독과 함께 역대 최연소로 태극마크를 달았다. 동춘 씨도 차 감독과 나이는 같았지만 중학교 시절 1년을 더 다니는 바람에 고3 때 대표팀에 발탁됐다. 유망주 발굴 차원의 발탁이라 국가대표 경기를 뛰지는 못했지만 늦게 축구를 시작한 것을 감안하면 태극마크를 획득한 시간이 차 전 감독보다 빨랐다. 동춘 씨는 결국 이듬해 열린 박스컵(박대통령컵 쟁탈 아시아축구대회) 때 태극마크를 달고 그라운드를 누빌 수 있었다.

 한양대 1학년 때인 1975년 말레이시아 메르데카컵에서 우승해 당시 박정희 대통령으로부터 체육훈장을 받았다. 동춘 씨는 국가대표로 국내 구기 스포츠 사상 처음 세계를 제패하기도 했다. 국제축구연맹(FIFA) 주관 대회는 아니지만 1976년 제5회 세계축구대학선수권대회에서 정상에 올랐다. 유니버시아드대회를 주관하는 국제대학스포츠연맹(FISU)이 축구만 따로 떼어 주최하던 대회였다. 동춘 씨는 당시 조광래(대구 FC 단장) 박창선 김희태 김황호 신현호 김성남 한문배 등과 출전했다. 한국은 브라질, 프랑스, 칠레와 3조에 속해 경기를 치렀다. 파라과이와의 결승에서 동춘 씨가 전반에 선제골을 터뜨렸다. 한국은 1-1 상황에서 심판 판정에 항의하는 파라과이가 기권하는 바람에 우승컵을 들어 올렸다. 그해 7월 31일 몬트리올 올림픽에서 레슬링의 양정모가 건국 이후 첫 금메달을 따면서 상대적으로 부각이 덜 됐지만 서울 김포공항에서 시청까지 카퍼레이드를 할 정도로 큰 영광으로 기억됐다.

 동춘 씨가 이렇게 잘나가게 된 배경에는 부모님의 든든한 후원이 있었다. 처음 동춘 씨가 “축구로 서울 가서 성공하겠다”고 했을 때 극구 만류했지만 두각을 나타내자 든든한 후원군이 됐다. 아버지 유성환 씨와 어머니 장길례 씨는 경기가 열리는 곳이면 어디든 달려갔다. 아버지는 셋째부터 막내까지 군산제일고에 들어가자 후원 회장을 맡아 10년 넘게 지원했다. 특히 어머니의 열성이 대단했다. 몸에 좋다는 음식은 뭐든 해 먹였다. 어머니와 관련해선 애틋한 사연도 있다. 1987년 교통사고로 갑자기 세상을 떠났을 때 아버지가 창고를 정리하며 마대를 하나 발견했는데 살아 있는 뱀이 들어 있었던 것이다. 축구하는 아들들을 위해 뱀까지 잡아 몸보신을 시켰던 것이다.

 잘나가는 큰형에 든든한 부모의 지원을 받은 형제들은 모두 축구화를 신게 됐다. 동관 씨는 “대표팀에 있던 형이 너무 공을 잘 차니 구암초교 감독이 축구하라고 졸랐다. 축구도 좋아해 바로 시작했다”고 말했다. 형만 한 아우 없다지만 동관 씨도 형 못지않은 활약을 펼쳤다. 군산제일중과 서울 영등포공고, 한양대를 거쳐 프로팀 포항제철(현 포항 스틸러스)에서 선수 생활을 하며 태극마크도 달았다. 포항제철 수석코치, 영등포공고 감독, 신갈고 감독, 대교여자축구단 감독을 거쳐 현재는 위덕대 남자팀 감독을 맡고 있다. 우석대 감독인 동우 씨도 형들과 비슷한 길을 걸었다. 군산제일중고, 한양대를 거쳐 프로팀 전남 드래곤즈에서 활약했다. 국가대표 및 유니버시아드 대표로 활약하며 체육훈장 기린장을 수상하기도 했다.

 잘나가던 형들에 비해 넷째와 막내는 다소 불운한 길을 걸었다. 실력은 출중했지만 운이 없었다. 넷째 동기 씨는 큰형이 국민대 감독이던 시절 직접 지도를 받고 실업팀 기업은행에 둥지를 틀었다. 청소년 및 유니버시아드 대표로 활약했고 대학시절 랭킹 1위로 프로에 갈 실력이었지만 당시 있었던 묘한 스카우트 갈등으로 실업팀에 남아야 했다. 동기 씨는 먼저 기업은행에서 활약하다 고향 전북에 생기는 프로팀 전북 버펄로(현 전북 현대)로 가려 했다. 기업은행에서 우승을 두 번 시키는 등 활약하며 전북행이 사실상 결정됐지만 당시 기업은행 감독이 거부하는 바람에 꿈을 접어야 했다. 하지만 아버지는 “형제가 다 축구선수 하면 뭐하냐. 은행 지점장도 하나 있어야지”라며 꿈을 심어 주었고 기업은행에서 선수 생활을 마치고 축구처럼 일을 열심히 해 부지점장까지 올랐다. 동기 씨는 직업은 은행원이지만 주말엔 ‘감독’으로 변신한다. 경기 남양주에서 아마추어 성인팀을 무료로 지도하고 있다. 숙명여대 감독도 맡았고 여기저기서 축구를 지도해 달라면 시간이 허락하는 한 몸을 던졌다. 일부 아마추어팀을 각종 대회에서 정상으로 올리기도 했다.

 한양대를 졸업하고 프로 성남 일화(현 성남 FC) 입단을 앞뒀던 막내 동옥 씨는 발목 부상으로 일찍 꿈을 접었다. 수술로 철심을 박고 재기해 성남 대신 실업팀으로 갔는데 팀이 해체되는 바람에 포기하고 지도자의 길로 접어들었다. 동옥 씨는 5형제가 모두 나온 구암초교에서 꿈나무를 기르고 있다.

 형제들은 고향에 남아 유망주를 키우는 동옥 씨를 통해 평생 꿔 왔던 꿈을 실현하기 위해 뜻을 모았다. 형제 모두가 참여하는 ‘군산 5형제 축구교실’을 열기로 결정한 것이다. 지금은 모두 각자의 일을 하고 있지만 은퇴를 하면 한자리에 모여 형제들이 힘을 합쳐 유망주를 키우겠다는 프로젝트다. 2012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유망주들이 날씨에 상관없이 훈련할 수 있도록 모교인 구암초교에 실내 축구장을 만들기로 하고 학교와 협의를 거쳐 거금을 들여 공사도 시작했다. 하지만 인조잔디에서 유해물질이 나온다며 도교육감이 시설을 허가할 수 없다고 하면서 차질이 빚어졌다. 형제들이 십시일반하고 은행 대출까지 받아서 짓는 시설이었는데 한순간에 물거품이 된 것이다. 형제들은 “국내 인증 마크를 달고 최고의 품질로 인조잔디를 깔겠다”고 했지만 도교육청이 정책에 반한다며 받아들이지 않았다. ‘5형제 축구교실’을 시작한 지 4년이 넘었지만 지지부진한 이유다. 야외 경기장에서 구암초교 선수들과 함께 ‘5형제 축구교실’ 선수들이 훈련은 하고 있지만 당초 생각했던 훈련 계획은 큰 차질을 빚고 있다. 동춘 씨는 “우리의 뜻이 지역 교육정책과 맞지 않아 조금 늦어지고 있어 안타깝다. 하지만 고향에서 유소년을 키우는 일인데 우리의 뜻만 고집하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학교, 도교육청 등과 협의해 좋은 결과를 내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동생들은 큰형을 따라 축구를 시작했지만 정작 큰형은 동생들에게 축구를 가르치진 않았다고 한다. 큰형이 동생들에게 한 말은 딱 두 마디. “알아서 느껴라.” “많이 먹어라.” 처음에 동생들은 큰형이 무심한 줄 알았지만 그게 아니었다. 해보니 축구는 자신이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잘 먹어야 힘을 쓸 수 있었다. 아주 단순한 진리였지만 5형제가 한국 축구에서 모두 두각을 나타낸 원동력이었다.

 “아버지 같은 큰형님 아니었으면 오늘의 우린 없습니다.” 동생들은 모두 한목소리로 외쳤다.

양종구기자 yjong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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