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新명인열전]“제주견 혈통 보존 위해 마구잡이식 번식 막을 것”

  • 동아일보
  • 입력 2016년 10월 1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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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 제주견 전문가 배기환 씨

배기환 이사는 오래전 오소리, 노루 등의 사냥에 탁월한 재능을 보였던 제주견과 함께 한라산국립공원에서 유해조수를 포획하며 최고의 멧돼지 사냥 전문가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임재영 기자 jy788@donga.com
배기환 이사는 오래전 오소리, 노루 등의 사냥에 탁월한 재능을 보였던 제주견과 함께 한라산국립공원에서 유해조수를 포획하며 최고의 멧돼지 사냥 전문가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임재영 기자 jy788@donga.com
 11일 오전 한라산 해발 1100m에 위치한 람사르습지인 1100고지 습지와 ‘숨어 있는 물 들판’이라는 뜻을 갖고 있는 숨은물벵듸 습지 사이 한라산국립공원 숲. 토종 제주견인 수컷 ‘먹가라’(14세)가 자신의 키보다 높은 제주조릿대 위로 코를 내밀고 ‘킁킁’거리며 냄새를 맡았다. 여러 차례 같은 행동을 반복하다 배기환 야생생물관리협회 제주도지부 홍보이사(48)에게 꼬리를 좌우로 빠르게 흔들었다. ‘뭔가 있다’는 신호였다. 국립공원 유해조수구제 업무를 맡고 있는 배 이사가 곧바로 “들어가”라고 외치자 먹가라는 옆에서 대기하던 수컷 ‘자왈’(7세), 암컷 ‘족은년’(7세)과 함께 쏜살같이 숲속으로 뛰어들었다.

 10여 분 뒤 “컹컹∼” 하는 소리가 숲의 정적을 깼다. 사냥감을 포착했다는 신호다. 배 이사는 동료 엽사인 강성식 씨(61)와 현장에 도착했다. 반달 모양으로 공격 대형을 갖춘 제주견들이 어미 멧돼지 2마리와 새끼 4마리를 포위한 뒤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빙빙 돌았다. 멧돼지를 5∼10m 전방에 두고 “탕, 탕, 탕∼” 총소리가 울려 퍼졌다. 한방에 한 마리를 잡는 ‘원샷, 원킬’이었다. 우왕좌왕하는 순간에 멧돼지 한 마리가 무리를 빠져나갔지만 자왈이 놓치지 않았다. 1.5km가량을 추격해 바위 구석에 멧돼지를 몰아넣자 배 이사가 마지막 일격을 가했다.

○ 멧돼지 포획 전문가


 멧돼지 무리가 보이면 한 마리에게만 달려드는 다른 지역 사냥개와는 달리 제주견은 무리를 한곳에 몰아넣어 한꺼번에 포획하도록 하는 영민함을 갖췄다. 무리에서 도망친 멧돼지를 끝까지 쫓아가는 끈질긴 습성도 특징이다. 배 이사는 “습지 탐방객과 학술조사연구원의 안전을 위협한다는 신고를 받고 출동했다”며 “사냥개로서 탁월한 능력을 갖춘 제주견 덕분에 멧돼지를 한꺼번에 소탕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제주에 서식하는 멧돼지는 재래 돼지나 본토의 야생 멧돼지와는 유전자가 다른 중국 계통이다. 2000년대 초 사육장을 탈출해 야생에 적응한 것으로 보인다. 원래 제주에 서식했던 멧돼지는 1900∼1930년에 멸종한 것으로 알려졌다. 멧돼지가 유해조수로 지정된 2010년부터 제주 지역에서 매년 50마리 안팎이 포획되고 있다. 배 이사는 이날 6마리를 포함해 올해 한라산국립공원 지역에서 멧돼지 46마리를 포획할 정도로 최고로 손꼽히는 엽사다.

 지금까지 멧돼지 200마리 이상을 포획했지만 배 이사에게 제주견이 없었다면 결코 이런 성과를 내지 못했을 것이다. 제주견은 몸무게가 12∼18kg에 불과하지만 300∼400kg에 육박하는 거대한 멧돼지를 궁지에 몰아넣고 필요할 때는 직접 격전을 벌이며 숨통을 끊어 놓는다.

○ 운명적인 동행

 제주견은 오래전부터 오소리, 꿩, 노루 등을 사냥할 때 뛰어난 활약을 보였다. ‘사농바치’(사냥꾼을 일컫는 제주어)는 총을 쓰지 않은 채 제주견만 데리고 야생 동물을 사냥하기도 했다. 하지만 일제강점기와 6·25전쟁 등을 거치면서 모피용으로 도살하고 공출, 식용으로 쓰이면서 대부분 사라졌다. 이제 남은 것은 배 이사가 키우고 있는 30마리 정도뿐이다. “토종 제주견은 사실상 멸종 위기입니다. 명맥을 잇기 위해 2003년 제주견연구회를 만들었지만 ‘잘난 체한다’는 주변의 따가운 시선과 예산 부족 등으로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배 이사는 제주시 애월읍에서 초등학교를 다니던 즈음 옆 동네에 사는 큰어머니로부터 생후 20일짜리 제주견인 ‘독고’를 선물로 받았다. 이때 그의 인생 행로가 결정됐는지 모른다. 2년가량 지나 독고가 어느 정도 성장했을 때 보리밭 고랑을 숨죽여 기어가다 표범처럼 점프해 꿩을 낚아채는 장면을 목격했다. 전기가 통한 듯 찌릿찌릿한 희열을 느꼈다. 학교를 마치고 나면 책가방을 집에 던져두고 독고와 꿩 사냥에 푹 빠졌다. 사냥개에 대한 궁금증이 커져 가자 직접 재래시장을 돌아다니며 명견을 찾았다. 마을을 순례하며 유명한 사냥꾼을 만나 1920∼1950년대 전설 같은 사냥 일화를 듣기도 했다. ‘마지막 포수’로 불리던 고수 등에게서 사냥 방법, 사냥개 관리, 훈련법 등을 전수받고 사진 등 자료도 꼼꼼히 수집했다.

○ 제주견 혈통 보존이 관건

 배 이사는 제주견 전문가이면서 제주교도소 교도관(교위)으로 근무하는 공무원이다. 고교, 대학 시절에는 태권도(공인 5단) 제주 대표를 지내기도 했다. 교정직으로 임용된 1992년부터 엽총을 이용한 사냥에 본격적으로 나섰다. 육지 원정을 다니며 엽사로서의 경험을 쌓았다. 제주견과 함께 경기 포천시에서 멧돼지 5마리를 잡는 등 원정 사냥에서도 명성을 떨쳤다. 제주 지역에 멧돼지가 급증하자 제주견의 진가가 드러났다. 제주견은 털 색깔에 따라 청개, 황구, 백구 등으로 나뉘는데 순백색은 없다. 특히 황색에 검정 계통 털이 섞인 청개는 제주견 중에서도 최고로 꼽힌다.  배 이사는 제주견을 육종하는 데 상당히 신중하고 까다롭다. 혼자서 관리할 수 있는 제주견이 30마리 정도라고 판단하고 더 이상 늘리지 않고 있다. 제주 지역 이외 반출을 엄격히 금지하고 있다. 제주견연구회 회원이 육지에 갔다가 “제주견을 분양해 주겠다”는 말을 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가차 없이 회원 자격을 박탈했을 정도다. “사냥개인 제주견이 사냥을 하지 않으면 본성을 잃어버리기 때문에 다른 용도로 쓰여서는 안 됩니다. 자식이 원한다고 해도 반출이나 마구잡이식 번식을 막을 겁니다.”

 배 이사는 사냥이라는 본능을 갖고 태어난 제주견이 집에서 생활하는 애완견으로 전락한다면 더 이상 제주견이 아니라고 여긴다. 그는 “제주견은 국내외 각종 재난 현장에서의 인명구조, 마약이나 폭발물 탐지견 등으로 영역을 확장할 수 있다”며 “체계적인 지원과 연구가 뒷받침된다면 세계적인 명견으로 성장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임재영 기자 jy788@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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