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석의 일상에서 철학하기]우리 안에 피는 수선화

  • 동아일보
  • 입력 2016년 7월 3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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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석 철학자·영산대 교수
김용석 철학자·영산대 교수
물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기 위해 매일 호수를 찾던 나르키소스는 자신의 아름다움에 매혹돼 결국 호수에 빠져 죽고 그 자리엔 수선화가 피었다. 나르키소스가 죽었을 때 요정들이 찾아와 그의 아름다움을 매일 가장 가까이서 볼 수 있었던 호수를 위로했다. 그의 죽음이 얼마나 슬프겠냐고. 그러자 호수는 이렇게 되물었다. “나르키소스가 그렇게 아름다웠나요?” 의외의 말에 요정들은 당혹스러웠다. “그대만큼 잘 아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나르키소스는 날마다 그대의 수면 위로 몸을 구부리고 자신의 얼굴을 들여다보았잖아요!” 호수는 한동안 가만히 있다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저는 지금 나르키소스의 죽음을 아쉬워하고 있지만, 그가 그토록 아름답다는 건 전혀 몰랐어요. 저는 그가 제 위로 얼굴을 비춰 볼 때마다 그의 눈동자에 비친 나 자신의 아름다운 모습을 볼 수 있었어요. 그런데 그가 죽었으니 아, 이젠 그럴 수가 없잖아요!”

위 이야기는 오스카 와일드가 각색했다는 나르키소스 신화입니다. 서구에서 나르키소스 신화는 다양한 변주를 보이지만, 그 결말은 항상 우리를 섬뜩하게 합니다. 호수는 나르키소스를 애도한 게 아니라, 자기애를 향유할 기회를 상실하게 된 자신을 슬퍼하고 있었던 것이죠. 타자의 비극적 죽음 앞에서도 그 죽음의 의미를 자기애의 쾌락을 상실했다는 차원으로 흡수해 버리는 잔인함마저 있습니다.

호수와 나르키소스에게는 오로지 ‘자기만’ 존재했던 것입니다. 타자는 나를 비춰주는 매체로서만 가치가 있었던 것이죠. 고대의 나르키소스가 수면에 매어 있었다면, 현대의 나르키소스는 화면에 매어 있습니다. 그 화면 속에는 아름답게 치장된 자신의 모습이 담겨 있습니다. 셀카는 말 그대로 타인을 찍기보다는 자신을 찍기 위한 행위입니다. 현대의 나르키소스는 디지털 기기의 화면에서도 언제나 자기 자신을 보고, 동료의 눈동자에서도 자기 자신을 찾습니다.

안 그럴 것 같지만 이른바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는 관계 맺기 이상으로 자기 표출적 욕망의 창구가 됩니다. SNS는 ‘친구 맺기’ 이전에 사용자 개개인 모두가 주인공이 되어 스스로 자신의 ‘삶을 연출’하는 공간입니다. 그리고 친구의 반응에서 연출된 자신을 보지요. 나르키소스의 눈동자에서 자신의 모습을 향유했던 호수처럼. 사용자가 깊은 관심을 갖고 노력을 들이는 부분도 바로 이 연출의 차원이 아닐까요. SNS의 구호로 걸맞은 것은 아마도 ‘나는 연출한다. 고로 존재한다’일지 모릅니다. 문자메시지는 또 어떤가요? 문자 보내기에는 여러 가지 편리함이 있지만, 상호성을 줄이고 일방성을 강화하는 특성 또한 있습니다. 전화 같은 동시적 상호소통이 갖는 미묘함을 내 쪽에서 시차적으로 사전 통제하려는 ‘나의 일방성’이 잠재되어 있음을 전적으로 부정할 수 있을까요.

물론 디지털 미디어들은 순기능이 많고, 그것을 부정하는 건 아닙니다. 장점과 강점보다 단점과 약점이 훨씬 더 적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약점의 특징은 의외로 치명적일 수 있다는 데에 있습니다. 나르시시즘의 약점은 ‘상처받기 쉽다’는 데에 있지요. 자기애에 침잠해 있다 보면, 타자성이 축소되고 외부의 부정적 자극에 의외의 상처를 입을 수 있습니다. 아주 쉬운 예로 SNS에서 ‘좋아요’를 기대했다가 인정받지 못하거나 문자메시지가 ‘무시’될 때, 속이 좀 상하지요. 셀카를 신경 써서 많이 찍지만 만족스럽지 못해도 좀 그렇습니다. 그럴 때마다 우리 가슴속 나르키소스는 꺾이고 애처롭게 수선화가 피어나곤 할지 모릅니다.

김용석 철학자·영산대 교수
#나르키소스#수선화#오스카 와일드#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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