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현진의 오늘과 내일]우스운 테스트베드가 된 한국

  • 동아일보
  • 입력 2016년 7월 26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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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현진 산업부장
박현진 산업부장
현장 기자 시절 외국 기업 최고경영자(CEO)와 인터뷰를 하거나 기업설명회에 참석할 일이 많았다. 한국이 큰 시장이 아닌데도 글로벌 기업들이 앞다퉈 진출하는 이유가 궁금했다. 그들은 레퍼토리처럼 “훌륭한 테스트베드(Testbed·시험무대)이기 때문”이라고 답했다. 최고의 정보기술(IT) 인프라, 까다로운 소비자, 유행에 민감하고 새로운 것에 열광하는 국민성을 감안하면 새로운 제품을 시험할 만한 시장으로 한국 같은 곳이 없다는 설명이었다. 이런 외국 기업의 관심에 나름대로 자긍심을 가졌던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요즘 외국 기업들이 한국 시장을 선호하는 다른 이유가 있었던 것이 아닌지 의구심이 든다. 한국 소비자와 정부 등을 무시하는 듯한 행태가 잇따르고 있어서다. 폴크스바겐, 옥시, 이케아는 한국 소비자와 정부를 ‘호갱’(호구 고객을 뜻하는 은어)으로 보는 외국 기업 3인방으로 지목되고 있다. 이런 기업이 3인방에 그치지 않을 수 있다는 점도 우려스럽다. 가까운 예로 글로벌 신용카드 회사인 비자카드의 행태에 국내 신용카드사와 소비자들이 반발하고 있다. 동북아에서 유일하게 한국만 해외 결제 수수료를 내년 1월부터 10% 인상하기로 했다는 내용을 통보해 왔다.

한국 기업들의 상대적 소외감도 크다. 이해진 네이버 이사회 의장의 이달 15일 기자간담회 발언에서 실감할 수 있었다. 그는 글로벌 IT 공룡들이 한국 시장에서 의무는 다하지 않고 요구만 늘어놓는다고 질타했다. 실제 유튜브, 페이스북, 구글, 애플 등이 한국에서 얼마를 벌어들이는지 알 방법이 없다. 외부감사나 공시 의무가 없는 유한회사로 등록돼 있어 공개할 필요가 없다. 국내에 진출한 알 만한 외국 기업은 대부분 이런 유한회사로 등록되어 있다. 세법에서도 외국 기업들이 피해 나갈 ‘구멍’은 많다. 지난해 국정감사에 제출된 자료에 따르면 2013년 1조 원 이상의 매출을 올린 해외 법인 15개사의 법인세 납부액이 ‘0’이었다는 사실에는 말문이 막힌다.

외국 기업들은 ‘한국의 법과 제도를 잘 지키고 있다’고 말한다. 거꾸로 보면 그만큼 우리의 법과 규정에 허술한 구석이 많다는 얘기다. 폴크스바겐과 이케아가 한국에서 ‘배짱’을 부리고 있는 것도 환경 및 소비자 보호 규정이 선진국에 비해 뒤처져 있기 때문이다. 외국 기업의 ‘깜깜이 경영정보’도 19대 국회 때 유한회사를 외부감사 대상에 포함시키는 ‘주식회사의 외부감사에 관한 법률 일부개정법률안’이 통과되었다면 달라졌을 것이다. 세법 개정으로 외국 기업도 법인세를 제대로 내게 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이어졌지만 여전히 숙제로 남아 있다. 유럽연합 러시아 프랑스 중국 등 해외에서 구글, 애플, 퀄컴, 오라클 등에 반독점의 철퇴를 가할 때 한국의 공정거래위원회는 쥐 죽은 듯이 조용했다.

혹자는 최근 외국 기업을 향한 불편함이 자칫 국수주의로 비칠 수 있음을 우려한다. 하지만 “매출은 알려야 하고 세금은 제대로 내야 하는 것”이라는 이해진 의장의 말처럼 기업의 투명 경영활동, 소비자 보호 의무, 사회적 책임에 국적이 따로 있을 수는 없다. 이참에 차별 없이 적용되는 잣대를 만드는 데 머리를 맞대었으면 한다. 또 외국 기업들도 입버릇처럼 얘기했던 이유와 달리 의무와 책임을 다하지 않고 ‘그들만의 리그’인 것처럼 수익을 가져갈 수 있는 테스트베드로 한국을 생각하지 않았기를 바란다.

박현진 산업부장 witnes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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