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이성호]길 위에서 노인들이 죽어간다

  • 동아일보
  • 입력 2016년 7월 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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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호 사회부 차장
이성호 사회부 차장
“이번 사건에 무슨 특별한 수사 방향이라도 있습니까?”

영화 ‘살인의 추억’의 끝자락. 어린 여학생의 희생을 막지 못한 형사반장에게 기자가 던진 질문이다. 물론 형사반장은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이 시점에서 정부와 정치권에 질문 하나를 던지겠다. “도대체 이 나라 고령화 정책에 무슨 특별한 추진 방향이라도 있습니까?”

고령화사회라는 단어가 처음 거론된 것은 1970년대 후반. 한국 사회에서 본격적으로 이슈가 된 건 2000년대 들어서다. 노인연금 돌봄서비스 실버주택 등 셀 수 없이 많은 정책이 쏟아졌다. 그러나 정부나 정치권이 내놓은 대책 중 고령 운전자의 안전을 위한 내용을 본 기억은 없다.

미국 통계국은 2050년 한국의 고령화율을 35.9%로 내다봤다. 지금(13.1%)의 세 배에 가까운 수준이다. 인구 10명 중 4명가량이 65세 이상 노인이라는 의미다. 고령화 속도만 놓고 보면 일본에 이어 2위다. 당연히 고령 운전자도 급증할 수밖에 없다. 예측대로면 현재 약 230만 명인 고령 운전자(면허 소지 기준)가 2050년 600만 명 안팎까지 증가하게 된다.

이미 국내에서 고령 운전자 교통사고로 숨지는 사람은 계속 늘고 있다. 2011년 605명에서 이듬해 718명으로 껑충 뛰었고 지난해에는 815명이 아까운 목숨을 잃었다. 고령 운전자가 일으킨 교통사고로 운전자 본인이나 동승자, 상대 운전자, 보행자가 숨진 경우다. 물론 이런 사고는 대부분 실수나 부주의가 원인으로 결론 난다. 하지만 이런 실수나 부주의가 왜 일어났는지를 들여다봐야 한다.

나이가 들면 신체 능력이 떨어지는 건 당연한 일이다. 눈이 침침해지고 돌발 상황 때 반응 속도도 느려진다. 젊을 때야 운전이 누워서 떡 먹듯 쉬운 일이다. 하지만 나이가 들면 1t이 넘는 차량을 시속 수십 km로 운전하는 일이 쉽지 않다. 문제는 대부분의 고령 운전자들이 자신의 몸 상태가 운전에 적합한지를 스스로 판단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그래서 일본은 75세 이상의 경우 인지기능 검사를 받게 하고 70세만 넘어도 면허 갱신 때 안전교육을 이수토록 했다. 면허 유지 조건을 까다롭게 한 것이다.

그러나 한국의 상황은 다르다. 고령 운전자 운전면허제도 강화 방안을 놓고 대화할 때마다 공무원들은 손사래부터 친다. 이유는 똑같다. “노인들이 반대해요.” 총선을 앞둔 올해 초에는 더 심했다. “어휴, 선거가 코앞인데…”, “표 떨어지는 얘기 하지 마세요”라는 말이 자연스럽게 나왔다. 공무원뿐만이 아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고령 운전자 교통안전 강화를 ‘노인 폄훼 정책’으로 생각하고 있다.

하지만 이는 사실과 달랐다. 동아일보가 고령 운전자 214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절반 이상(50.2%)이 적성검사 강화에 찬성했다. 의무적으로 교통안전 교육을 받아야 한다는 의견도 60%가 넘었다. 공무원들이 ‘표심’만 생각하며 손놓고 있을 때 노인들은 자신의 생명을 지키기 위한 제도 마련을 절실히 원하고 있던 것이다.

물론 노인들이 마음대로 쓸 수 있도록 손에 현금을 쥐여주는 고령화 정책도 필요하다. 하지만 한 해 800명이 넘는 사람이 길 위에서 숨지고 있는 현실을 외면한 고령화 정책이 과연 정상일까? 고령화 정책의 목표는 건강한 노년의 삶을 보장하는 것이다. 노인들의 생명을 안전하게 지키는 건 고령화 정책의 기본이다. 뒤늦게 경찰 등 관계기관이 제도 강화를 추진하고 나섰다. 하지만 접근 방식을 바꿔야 한다. 건강검진 받듯이 나이가 들면 ‘면허검진’을 자연스럽게 받도록 분위기를 만들어가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고령 운전자 교통안전 대책은 ‘노인 폄훼 정책’이라는 오명을 절대 벗을 수 없다.
 
이성호 사회부 차장 starsky@donga.com
#고령화 정책#고령화 사회#고령 운전자 운전면허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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