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문명의 프리킥]R&D에 돈 펑펑 쓰고도 노벨상 못 타는 이유

  • 동아일보
  • 입력 2016년 6월 2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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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문명 논설위원
허문명 논설위원
그제 생물학연구정보센터 브릭(BRIC) 사이트에 서울대 의대 생리학교실 호원경 교수의 글이 올라왔다. 최양희 미래창조과학부 장관에게 국가연구비 지원 시스템을 개혁하라고 하는 내용이다. 그의 글은 조회수가 금세 수천 건에 이를 정도로 관심을 끌었다. 그를 직접 만났다.

호 교수는 지난달 31일 미래부가 발표한 초고해상도 ‘뇌지도’ 사업에 대해 ‘10년간 3400억 원을 투자한다는 대규모 국책사업이지만 프로젝트 타당성에 심각한 문제가 있다’고 조목조목 짚었다. 한국 문단의 거목 고 박완서 선생의 셋째 딸인 그의 담백하면서도 본질을 고민하는 모습에서 생전의 모친 모습이 겹쳐졌다.

그는 지난달 11일 뇌신경과학회 주최 공청회에 참석했다가 ‘뇌지도’란 말을 처음 들었다고 했다. “이미 미래부 공무원들과 연관된 과학자 그룹이 계획을 다 만들어놓고 설명하는 형식적인 자리였다. 인공지능(AI)이 유행이다 보니 미래부가 서둘러 추진하고 있다는 느낌이 확 들었다.”

호 교수는 며칠 동안 선진 각국의 정부 주도 뇌 연구사업 동향을 파악한 뒤 더이상 침묵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미국 버락 오바마 정부도 ‘브레인 이니셔티브’라는 이름의 뇌 연구를 주도하고 있지만 우리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현실적이고 구체적이었다. 문제점을 짚은 장문의 편지를 연구사업단에 보냈더니 곧 토론 자리를 마련하겠다고 해 기다리고 있었는데 갑자기 미래부가 대대적으로 발표해 버렸다.”

호 교수는 수천억 원이 들어가는 국책사업을 최소한의 여론 수렴도 없이 밀어붙이는 모습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고 했다. 그런 의문은 며칠 뒤 연구진을 만난 자리에서 풀렸다. 그들은 호 교수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문제가 많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일단 시작하면서 풀어가자. 이렇게 해야 미래부가 돈(연구비)을 준다고 하니 어떡하느냐. 빨리 기획안을 통과시켜 올해 안에 기획재정부 ‘예타’(예산타당성 조사)를 마쳐야 내년부터라도 몇백억 시범 사업을 시작할 수 있다.”

대한민국 국내총생산(GDP) 대비 연구개발(R&D) 투자는 양과 속도 면에서 세계 1위다. 매년 총 19조 원의 예산이 쓰이며 이 중 4조 원이 대학에 투입되니 어마어마한 규모다. 과학학술지 네이처가 최근 ‘한국이 그렇게 많은 돈을 쏟아붓고도 노벨상을 못 타는 이유’를 집중적으로 분석할 정도면 알 만하지 않은가. 네이처는 ‘알파고와 이세돌 대국이라는 단 하나의 이벤트만 갖고도 2020년까지 무려 1조 원을 AI에 투자하겠다고 결정해버리는 정부의 주먹구구식 대응이 문제’라고 했다.

연구비 지원 관련 기관장을 지낸 과학계 중진의 말이다. “호 교수의 지적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옛 과학기술부, 지금의 미래부 공무원들은 R&D시장(?)에서 슈퍼 갑이다. 관료들이 ‘기획 연구’라는 이름으로 주제, 내용, 연구자를 모두 정하기 때문이다. 돈이 없으면 연구 자체가 불가능한 과학자들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들에게 줄을 대려고 한다. 기초과학계는 물론이고 인문사회계까지도 ‘공부는 뒷전이고 돈 잘 따오는 교수가 능력 있는 교수’로 통한다. 갈수록 더 심해지고 있다.”

철밥통에 연금에, 관료들이나 그 주변을 맴도는 학자들은 급할 게 없다. 혈세를 갖다 바치며 “혹시 우리를 먹여 살려 줄 신기술이라도?” 하는 마음으로 그들을 바라보는 국민만 순진한 것인가. 부디 당신들 지갑에서 나오는 돈처럼 세금을 귀하게 써 달라.
 
허문명 논설위원 angelhuh@donga.com
#미래부#뇌지도 사업#뇌신경과학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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