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북제재, 모스크바의 두 얼굴

  • 주간동아
  • 입력 2016년 5월 15일 09시 4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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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말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대북제재 전문가 패널이 작성한 ‘2015 대북제재 보고서’.
2월 말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대북제재 전문가 패널이 작성한 ‘2015 대북제재 보고서’.
5월 초순,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안보리) 대북제재 결의 2270호를 이행하기 위한 러시아의 대통령령 초안이 정부 부처 간 조율을 마치고 조만간 발효될 것이라는 소식이 외신을 통해 타전됐다. 러시아 정부 인터넷 사이트에 올라온 초안은 대북금융 봉쇄, 북한 광물 수입 금지 등 안보리 결의사항을 충실히 반영한 내용. 한국 정부 당국이 “국제사회 대북제재가 본격화하는 또 하나의 신호탄”이라며 적극적으로 홍보에 나설 만한 뉴스였다.

그러나 같은 시각, 정작 유엔본부가 있는 미국 뉴욕에서는 국내에서 거의 주목받지 못한 다른 소식이 외교가 핫이슈로 떠올랐다. 4월 15일과 28일 북한이 시도한 중거리탄도미사일(IRBM) 무수단 시험발사를 규탄하고자 안보리가 진행한 언론성명(Press Statement) 발표가 뜻밖의 암초에 부딪혀 하염없이 늦어지고 있다는 뉴스였다. ‘몽니’의 주인공은 바로 러시아였다. 주유엔 러시아 대표부의 공식 발표는 “한국과 미국의 군사활동 축소를 요구하는 문장을 성명서에 포함시켜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 시기 뉴욕을 방문해 “한미 합동군사훈련을 중단하면 핵·미사일 개발 실험을 중단할 용의가 있다”고 발언한 이수용 북한 외무상의 손을 들어준 셈이다.

“가장 노골적인 비협조 태도”

헷갈리는 모스크바의 두 얼굴, 과연 진의는 무엇일까. 2월 말 유엔 안보리 대북제재 전문가 패널이 공개한 ‘대북제재 보고서’는 이를 가늠할 수 있는 결정적 자료다. 그간 러시아 정부가 안보리의 대북제재 활동에 노골적으로 비협조적인 태도를 견지해왔다는 게 골자. 전문가 패널이 이를 규탄하는 데 보고서의 상당 분량을 할애했을 정도다. 예컨대 안보리가 금수품목으로 제한한 정밀공작기계의 대북 수출을 러시아 정부가 허가했다는 정황이 2014년 파악됐지만, 제재 결의 위반 여부를 조사하겠다는 안보리 요청을 러시아 정부가 거부한 일이 대표적이다. 근거가 된 북한 기업 인터넷 홈페이지의 수입 실적 기록과 무역 데이터는 공식자료가 아니므로 신뢰할 수 없다는 게 러시아 정부의 주장이었다. 오히려 전문가 패널이 불필요하고 부당한 요구를 하고 있다는 취지였다.

2015년에는 대량살상무기 관련자로 지목된 북한 측 인사를 추적하는 작업이 러시아의 반대에 부딪혀 좌절되기도 했다. 실제로는 북한의 대표적인 불법 무기거래 조직인 조선광업개발회사(KOMID) 소속이지만 대외적으로는 주모스크바 북한대사관 외교관으로 위장해 활동 중인 두 명의 북한 관료가 그 대상. 이들의 활동 사항을 파악해달라는 안보리 측 요청에 러시아 정부는 “미국과 프랑스가 제재 대상으로 지목했다는 것만으로 그들이 불법행위를 저질렀다고 볼 근거는 없다”며 거부한다. 안드레아 버거 영국 왕립합동군사연구소(RUSI) 선임연구원은 “이들 사례는 러시아가 북한의 자국 내 불법행위를 묵인하고 있음을 명백히 보여준다”며 “러시아의 고의적인 비협조는 북한의 핵 개발 활동을 추적할 수 없게 만드는 걸림돌”이라고 잘라 말했다.

가장 심각한 부분은 러시아가 북한의 대량살상무기 개발 진전에 결정적으로 ‘기여’한 국가라는 점. 북한 핵·미사일 기술의 최근 상황을 보면 핵심부 설계나 노하우가 대부분 러시아에서 왔거나 옛 소련 과학자들과의 교류로 큰 진척이 있었음이 분명하다. 한 전직 정보당국 관계자는 “외교관계를 의식해 자제하고 있을 뿐, 러시아의 관련 기술 통제가 철저했다면 북한 핵 문제가 이처럼 심각해지지 않았으리라는 데 이견의 여지가 없다”고 말했다.

안드레이 사하로프. 1970년대 옛 소련 인권 문제를 집요하게 폭로한 공로로 노벨평화상을 수상해 우리에게도 귀에 익은 핵 과학자다. 1953년 실험에 성공한 핵폭탄 슬로이카(Sloyka)를 디자인한 당사자. 눈여겨볼 부분은 북한이 올해 초 실시한 4차 핵실험에서 선보인 증폭형 핵폭탄이 슬로이카와 공학적으로 매우 흡사하다는 점이다. 북한 핵의 기술적 특성에 천착해온 이춘근 과학기술정책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슬로이카는 미국과 소련의 수소폭탄 개발 경쟁 당시 소련이 1단계로 개발한 초기 형태의 증폭형 핵분열탄”이라며 “북한 4차 핵실험의 특성과 이후 평양의 언급을 종합하면 이 디자인을 갖다 썼을 개연성이 높다”고 평가했다.

비록 실패를 거듭하고 있지만, 무수단 미사일의 기반 기술 역시 옛 소련의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SLBM) SS-N-6(소련명 R-27)였음은 널리 알려져 있다. 북한이 그간 선보인 단거리미사일은 중동에서 구매한 스커드미사일 엔진을 기반으로 제작한 것이지만, 최근 급속도로 공력을 기울이는 중거리 이상 미사일은 모두 SS-N-6 엔진을 사용했다는 게 정설이다. 사거리 1만km 이상으로 미국 본토를 타격할 수 있다는 KN-14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역시 이 엔진 여러 개를 묶은 것이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제프리 루이스 미국 비확산센터(CNS) 소장에 따르면 소련의 SS-N-6 개발 기술자들과 북한 당국의 협력이 처음 포착된 것은 1992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국정원 보고에 “용서 구하라” 으름장

이뿐 아니다. 2014년 5월 북한이 선전영화를 통해 공개한 함대함 크루즈미사일 역시 사거리 130km 수준의 러시아 미사일 Kh-35와 쌍둥이다. 바다 위를 낮게 날아가 상대 함정을 격파하는 이 미사일은 요격이 쉽지 않아 우리에게는 치명적인 무기체계다. 문제는 이 미사일이 러시아에 실전배치된 것이 소련 붕괴 후인 1990년대 중반이라는 사실이다. 앞서의 다른 기술은 ‘소련 시절의 일’로 치부한다 해도, 이 경우는 러시아 정부의 협력이나 방조를 심각하게 의심할 수밖에 없다.

2월 7일 북한의 장거리로켓 발사 직후 소집된 국회 정보위원회 전체회의에서 국가정보원이 “북한이 발사한 로켓의 주요 부품이 대부분 러시아에서 공급된 것으로 보인다”고 보고한 것은 이러한 맥락에서다. 그러나 러시아 외무부는 이내 “러시아가 북한에 로켓 부품을 제공했다는 한국 정보당국의 발표는 무책임하고 아주 비전문가적인 것”이라며 “증거를 공개하든 발언을 취소하고 용서를 구하든 해야 할 것”이라고 공세를 펼친다. 국정원이 이내 “러시아 정부가 관여됐다는 증거는 없으며 러시아산 부품이 북한에 의해 빼돌려진 것으로 본다”고 물러서야 했던 이유다.

거듭 확인되는 증거들은 북한의 대량살상무기 근원이 대부분 러시아라는 사실을 폭로하지만, 정작 러시아는 이를 추적하기 위한 유엔 안보리 활동에 노골적으로 반기를 들어왔다. 일부는 소련 붕괴 과정에서 제대로 통제되지 못한 기술이나 엔지니어가 북한으로 흘러 들어간 것으로 보이나 러시아 정부가 들어선 후 이전된 기술도 확인된다. 북핵 문제의 최대 책임자임에도, 북한의 핵 개발을 저지하는 국제사회의 공동전선에서는 ‘강대국의 안하무인’만을 반복하고 있는 셈이다. 모두가 북한을 움직일 주체로 중국만 쳐다보는 사이, 가장 심각하게 뚫려 있는 ‘핵개발 구멍’의 숨은 1인치다.

황일도 기자 shamora@donga.com

<이 기사는 주간동아 2016년 5월 18일~5월 24일자 1038호에 실린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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