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한기흥]전두환의 언변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11월 2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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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공화국 시절 오후 9시 정각에 시작한 ‘땡전뉴스’의 톱은 노상 전두환 대통령의 동정에 관한 것이었다. 근엄한 표정으로 “본인은… 어쩌고저쩌고” 하는 그의 카랑카랑한 음성과 딱딱한 인상은 권력을 찬탈한 군인 출신답게 권위적인 느낌이 물씬했다. 그런데 당시 직접 대면할 기회가 있었던 이들은 그가 하고 싶은 말을 거침없이 하지만 구수한 입담으로 재미있는 이야기도 곧잘 한다고들 했다. 설마….

▷1994년 4월 22일 전 전 대통령이 퇴임 후 처음으로 모교인 대구공고를 방문해 까마득한 후배들 앞에서 강연했다. 열렬한 환호에 고무됐던 걸까. 그는 공개석상인데도 반쯤 말을 놓은 채 학창 시절 “심심하면 남의 사과를 몰래 따먹은 일”부터 시작해서 별별 얘기를 다 했다. “백담사로 ‘땜장이’(공고 출신에 빗대) 동문들이 등산객이나 신도를 가장해 몰래 찾아왔다”는 일화를 소개하며 “술과 고기를 절 부근에서 먹으니 정말 살 것 같더라”라고도 했다. 일부 청중은 “대통령을 지낸 분이 품위 없이…” 했지만 학생들은 거의 까무러쳤다.

▷전 전 대통령은 26일 김영삼 전 대통령 빈소를 찾아 조문한 뒤 고인에 대한 평가나 화해 여부엔 함구한 채 엉뚱하게 자신의 금주, 금연 얘기만 잔뜩 하고 돌아갔다. “난 담배는 옛날부터 못 묵었고요, 술은 군대생활 할 때 마이 묵고 근데 술도 맛을 몰라요.” “(군 시절) 요놈들이 내가 (담배를) 안 피니까 자기들이 핀다.… 내가 대여섯 살 많은데.” 곤란한 질문에 동문서답하거나 딴 얘기로 눙치는 것도 화제를 주도할 수 있기에 가능할 터이다. 이럴 땐 전직 대통령이라도 갑은 갑이다.

▷타계한 전직 대통령들이 늘고 있다. 생전엔 지지와 비판이 극명하게 엇갈려도 사후 평가는 아무래도 밝은 면을 더 부각하는 쪽으로 달라진다. 전 전 대통령은 12·12쿠데타, 5·18민주화운동 무력진압, 거액의 비자금 등 지울 수 없는 역사적 과(過)와 함께 사상 최고의 경제성장률 같은 성과도 남겼다. 그에 대한 평가와 함께 수많은 발언 중 무엇이 나중에 국민 기억에 남을지 궁금하다.

한기흥 논설위원 eligius@donga.com
#전두환#5공화국#김영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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