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십년 계승한 춤과 정신을 제자에게 평가 받으라니…”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11월 26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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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급진단]유-무형 문화재 지정 실태, <상>무용 예능보유자 15년만의 선정 앞두고 논란
서열 단계 보유자-전수조교-이수자 順
심사위원 11명 중 이수자도 포함… 스승뻘인 전수조교 평가하는 셈
2002년 살풀이춤 보유자 선정때도 탈락자 이의제기로 인정보류 사태

한국 전통춤의 거목인 이매방 명인은 중요무형문화재 제27호 승무, 제97호 살풀이춤의 명예보유자였다. 이 명인은 1987년 승무, 1990년 살풀이춤 예능보유자로 지정됐다. 생전 고인의 승무 공연. 동아일보DB
한국 전통춤의 거목인 이매방 명인은 중요무형문화재 제27호 승무, 제97호 살풀이춤의 명예보유자였다. 이 명인은 1987년 승무, 1990년 살풀이춤 예능보유자로 지정됐다. 생전 고인의 승무 공연. 동아일보DB
《 요즘 무용계의 최대 이슈는 15년 만에 이뤄지는 중요무형문화재 예능 보유자(인간문화재) 선정이다. 30일부터 문화재청은 살풀이춤, 태평무, 승무의 인간문화재 선정에 들어간다.

인간문화재는 선정 때마다 잡음이 끊이지 않았다. 이번에도 벌써부터 의혹 제기와 뒷말이 무성해 무용계는 뒤숭숭한 분위기다. 문화재청의 허술한 진행과 기준에 대한 불만의 목소리도 높다. 무형문화재뿐 아니라 유형문화재도 최근 증도가자 논란에서 보듯 지정 절차에 문제점을 드러냈다. 유·무형문화재의 지정 실태를 긴급 진단하는 기획 시리즈를 3회에 걸쳐 싣는다. 》
“대학 입시처럼 1년에 한 번 있는 심사도 아니고 승무는 15년, 살풀이춤은 25년, 태평무는 27년 만에 인간문화재가 탄생할 기회예요. 다들 예민하고 혈안이 돼 있는 게 당연하지 않겠어요?”(무용계 인사)

이달 30일과 다음 달 3, 7일 세 차례에 걸쳐 진행되는 중요무형문화재 예능 보유자(인간문화재) 심사를 앞두고 무용계가 술렁이고 있다. 2000년을 마지막으로 인간문화재를 내지 못하다가 이번에 문화재청이 세 분야를 한꺼번에 심사키로 했기 때문이다.

심사 일정이 나오기 전부터 무용계에선 ‘A가 이미 내정됐다더라’ ‘B가 국회의원을 통해 로비를 벌이고 있다더라’ 등 ‘카더라’식 소문도 파다했다. “C가 돼서는 절대 안 된다”는 비방도 나돈다. 한 무용계 인사는 “총성 없는 전쟁 수준”이라고 표현했다.

중요무형문화재 제92호 태평무의 유일한 명예보유자인 강선영 명인. 태평무는 현재 보유자가 없는 상태다. 동아일보DB
중요무형문화재 제92호 태평무의 유일한 명예보유자인 강선영 명인. 태평무는 현재 보유자가 없는 상태다. 동아일보DB
○ 15년 만의 선정, 왜?

문화재청이 15년 만에 인간문화재 지정에 나선 건 승무와 살풀이춤 두 분야의 인간문화재였던 이매방 선생이 올 8월 작고하면서 보유자 지정을 서둘러야 했기 때문이다. 특히 살풀이춤의 경우 이매방 선생이 유일한 인간문화재였으나 2013년 명예보유자(80세가 넘으면 보유자 지정 해제)가 돼 2년간 공백 상태였다.

승무의 경우 2명의 보유자 중 한 명인 정재만 선생이 지난해 7월 갑자기 별세하는 바람에 충원의 필요성이 제기됐다. 태평무는 유일한 보유자였던 강선영 선생이 2013년 명예보유자가 되면서 역시 보유자가 없는 상황이 됐다.

이에 대해 무용계에서는 “문화재청이 보유자들이 고령인 만큼 공백이 생기지 않도록 미리미리 보유자를 선정했어야 했는데 이제 와 부랴부랴 서두르는 것”이라고 불만을 터뜨렸다.

○ “스승이 제자에게 평가받는 꼴” 불만 팽배

이달 중순경 인간문화재 선정 심사위원이 구성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심사위원 명단이 무용계에 나돌았다. 동아일보가 입수한 총 11명의 심사위원 명단에 따르면 이 중에는 심사 대상인 살풀이춤과 승무, 태평무의 이수자가 5명 포함돼 있다. 무용계에서 문제를 삼는 것도 이 부분이다.

중요무형문화재 전승 체계는 크게 ‘보유자(인간문화재)-전수교육조교-이수자’ 순으로 돼 있다. 인간문화재는 해당 춤의 최고 권위자이고 전수교육조교는 인간문화재의 제자 중에서 춤의 전통성을 잘 계승했다고 평가받아 뽑힌 이들이다. 가장 하위 단계인 이수자는 보유자와 전수교육조교로부터 3년 이상의 이수 기간을 거친 뒤 이수시험을 통과한 사람이다.

이번에 인간문화재에 신청한 것으로 알려진 25명 가운데 9명은 태평무, 승무, 살풀이춤의 전수교육조교다. 결국 이들은 자신이 전수한 이수자로부터 거꾸로 심사를 받게 된 것.

한 무용계 인사는 “한마디로 대학교수(보유자)를 뽑는데 박사학위 소지자인 시간강사(전수교육조교)들이 지원하고, 심사위원으로 대학원생(이수자)이 들어온 셈”이라며 반발했다. 도제식 문화가 뿌리 깊은 무용계에서는 “제자 격인 이수자에게 춤의 전통성을 평가받는 것 자체가 치욕적”이라는 말도 나온다.

이에 대해 문화재청 관계자는 “대부분 교수들에게 심사를 맡겼는데 이수자들 중에는 무용학과 교수가 많아 그런 말이 나오는 것”이라며 “조사(심사)위원을 선정하는 기준은 전문성이지 실기 능력이 아니기 때문에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본다”고 설명했다.

○ 과거에도 무형문화재 선정 과정서 잡음…문화재청 신뢰 하락

인간문화재는 선정 때마다 투서와 이의 제기가 잇따르는 등 잡음이 끊이질 않았다. 2002년에는 작고한 인간문화재 김숙자류 살풀이춤의 보유자 후보 2명을 선정했다. 하지만 인정 예고 기간 중 탈락자가 이의 제기를 하면서 문화재위원회가 심의 끝에 인정 유보 결정을 내렸다. 검찰 내사로도 이어질 만큼 논란이 됐으나 이후 유야무야돼 지금까지도 김숙자류 살풀이춤은 보유자를 내지 못하고 있다.

춤은 아니지만 다른 분야에서도 중요무형문화재 보유자 인정을 놓고 잡음이 끊이지 않는다. 2011년 문화재청은 경기민요 보유자 선정을 한다고 공고했다. 하지만 5명의 신청자 중에서 한 명의 보유자도 선정하지 못했다. 문화재청 관계자는 “문화재위원회에서 보유자 인정을 부결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결국 신청자 중 한 명이 문화재청 결정에 반발하며 현재 행정소송을 벌이고 있다.

김정은 기자 kimj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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