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선 앞두고 비겁한 짓”… DJ 비자금 수사 반대한 YS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11월 2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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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삼 前대통령 서거]김태정 당시 검찰총장이 밝힌 비화

1997년 검찰총장 임명



YS가 대선을 넉 달 앞둔 1997년 8월 김태정 신임 검찰총장에게 임명장을 전달하고 있다. 김 총장은 DJ 정부 때 유임됐다가 1999년 5월 법무부 장관에 기용됐다. 동아일보DB
1997년 검찰총장 임명 YS가 대선을 넉 달 앞둔 1997년 8월 김태정 신임 검찰총장에게 임명장을 전달하고 있다. 김 총장은 DJ 정부 때 유임됐다가 1999년 5월 법무부 장관에 기용됐다. 동아일보DB
“비겁한 수사를 하면 되나.”

1997년 제15대 대통령 선거를 두 달 앞둔 10월 19일 일요일 새벽. 김영삼(YS) 대통령은 마주 앉은 검찰총장에게 ‘국민회의 김대중(DJ) 후보 비자금 의혹 수사’에 대해 반대 의사를 분명히 했다. 당시 여당인 신한국당 강삼재 사무총장은 “국민회의 김대중 후보가 365개 가·차명 계좌에 670억 원대 비자금을 관리해 왔다”고 폭로하고 DJ를 검찰에 고발한 상황이었다. 지지율이 추락하던 이회창 후보 측이 반전을 노리고 꺼낸 비장의 카드였지만 이 후보를 정치에 입문시킨 주인공이자 신한국당 명예총재였던 YS의 생각은 확고했다.

“선거 때 상대 후보의 약점을 들춰내 비난한 사람치고 당선된 사람이 없다. 대선을 앞두고 (DJ) 비자금을 수사하는 것은 비겁한 짓이다.”

당시 YS와 독대한 검찰총장은 김태정 전 법무부 장관(74)이었다. 그는 23일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YS의 결론은 정치적 고려 없이 단순했다. 독대 내내 여야 대선 후보의 이름은 한 차례도 언급하지 않았고 지금 해야 하는 수사인지 본질만 따졌다”고 회고했다.

정치적 오해를 피하기 위해 두 사람의 독대는 극비리에 진행됐다. 김 전 장관은 대통령 비서실의 안내에 따라 일요일 새벽 관용차가 아닌 개인 차량으로 청와대 관저를 찾았다. 독대 이틀 뒤 검찰이 ‘비자금 수사 유보’ 방침을 발표하자 이 후보 진영에서는 “YS가 깊이 관여했다”며 ‘청와대 음모설’을 제기했다. 이 후보와 사이가 벌어진 YS가 ‘이회창 죽이기’에 나섰다는 것이다. 검찰 발표 내용은 공교롭게도 이 후보의 국회 대표연설 도중 TV 자막으로 전해졌다. YS는 이튿날 이 후보의 탈당 요구를 받고 11월 자신이 만든 신한국당을 탈당했다.

김 전 장관은 “(수사 유보 결정에) YS의 지시는 없었다”고 거듭 강조했다. 당시 기자회견에서도 그는 “청와대나 여당과 협의하지 않은 검찰의 독자적 판단”이라고 밝힌 바 있다. 독대도 김 전 장관의 요청에 의해 이뤄졌다고 했다. YS는 먼저 연락하거나 사건 처리에 대해 묻지 않았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수사 유보 얘기를 먼저 꺼낸 것도 김 전 장관이었다. YS는 형평성, 경제위기 속 경제인 수사 부담 등 김 전 장관이 든 유보의 변을 묵묵히 들은 뒤 “총장 말이 다 맞다”며 재론하지 않았다고 한다.

오히려 YS는 독대 다음 날 검찰에서 아무 소식이 없자 김 전 장관에게 전화를 걸어 “왜 발표하지 않느냐”며 궁금해했다고 한다. 고검장 의견 수렴을 위해 시간이 더 필요하다고 답하자 YS는 “알았다”며 더 묻지 않았다. DJ 비자금 의혹을 폭로했던 강삼재 전 의원도 당시 언론 인터뷰에서 “YS는 검찰이 내부에서 결정하도록 묵인했을 뿐”이라며 청와대 음모설을 일축했다.

김 전 장관이 YS를 생전 마지막으로 본 것은 지난해 10월. 2013년 폐렴으로 1년 6개월간 서울대병원에서 치료를 받다가 상도동 자택으로 퇴원한 직후였다. 이 자리에서 김 전 장관은 YS를 위해 직접 쓴 A4용지 1장짜리 기도문을 읽었다. YS가 퇴임 전 김 전 장관을 다시 관저로 불러 ‘총장이 냉철하게 일할 수 있게 특별히 보살펴 달라’고 기도해준 데 대한 답례였다. YS는 “김 총장 기도 참 잘한다”며 그를 그 다음 주 일요일 오전 가정예배에 다시 초대했다. 예배를 마친 후 YS의 아침 식탁엔 삶은 계란과 떡 몇 개, 된장국이 전부였다. 김 전 장관은 “식사 중에도 부인 볼에 뽀뽀하시며 어찌나 애틋하게 대하시는지 보는 사람도 덩달아 기분이 좋았다”고 했다.

YS 서거 당일 장례식장을 찾은 김 전 장관은 영정 앞에서 눈물을 흘렸다. 그는 “정치인 YS는 모른다. 하지만 검찰총장으로서 모신 대통령 YS는 결정적인 순간에도 정치적 외압을 넣지 않은 솔직 담백하고 깨끗한 통수권자였다”고 진심 어린 존경을 표했다.

신동진 기자 shin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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