핏빛 전쟁… ‘고담시티’로 전락한 멕시코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8월 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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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일 멕시코 수도 멕시코시티에서 거행된 주간지 프로세스의 사진기자 루벤 에스피노사(31)의 장례식. 시민들은 “주지사가 살해자”라는 피켓을 들고 항의 시위를 벌였다. 한 40대 여성은 “수십 명의 언론인이 의문의 죽음을 당했지만 달라진 게 없다. 이번에도 그냥 넘어가선 안 된다”고 했다.

숨진 에스피노사 기자는 지난달 31일 멕시코시티의 한 아파트에서 인권활동가, 대학생 기자, 가정부 등 여성 4명과 함께 머리에 총을 맞고 숨진 채 발견됐다. 부검 결과 이들은 손발이 묶인 채 고문을 받았고 여성 피해자 3명은 성폭행까지 당한 것으로 드러났다.

에스피노사 기자는 지난해 2월 ‘무법천지 베라크루스’라는 제목의 프로세스 주간지 표지에 자신이 찍은 집권 제도혁명당(PRI) 소속 하비에르 두아르테 주지사의 사진이 실린 뒤 살해 협박을 받아온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숨지기 전 “2012년 주 정부 부패를 파헤치다 살해된 프로세스의 여기자처럼 되지 않으려면 사진을 그만 찍는 게 좋다는 말을 들었다”고 폭로하기도 했다.

미겔 앙헬 만세라 멕시코시티 시장은 3일 기자회견을 열고 “모든 가능성을 열어 두고 철저히 수사하겠다”고 밝혔다.

멕시코는 강력 범죄가 끊이지 않는, 지구상에서 가장 위험한 나라로 통한다. 2000년 이후 범죄조직과 손을 잡지 않은 시장과 장관 5명이 피살됐고, 지방 소도시에서는 경찰이 습격을 받는 일이 빈발하고 있다.

멕시코의 범죄는 PRI의 장기집권과 관련이 있다. PRI가 과거 수십 년간 범죄조직과 결탁해 치안을 유지해 온 탓에 갱단의 세력이 공권력을 위협하는 수준으로 성장한 것. 2006년 정권을 잡은 국민행동당(PAN)은 ‘범죄와의 전쟁’을 선포하고 대대적인 범죄조직 소탕에 나섰지만, 그 과정에서 5만 명 이상이 희생됐다.

핏빛 전쟁에 진절머리가 난 국민들은 2012년 선거에서 ‘범죄와의 공존’을 택했다. PRI 후보로 나선 엔리케 페냐 니에토가 대통령에 당선됐고, 이후 멕시코는 ‘고담시티’(영화 ‘배트맨’에 나오는 무법천지 도시)가 됐다. 멕시코 갱단이 가장 무서워하는 미국과의 공조도 현 정부의 소극적 태도로 지지부진한 상황이다.

이설 기자 snow@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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