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명 기자의 달콤쌉싸래한 정치]청와대를 떠나며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8월 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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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체계 근본적 변화 없이 국가시스템 바꿀 수 없다는 것
朴대통령도 뼈저리게 느꼈을 것
개헌 포함 정치로드맵 총선전 제시… 靑민정기능과 소통행보도 강화를

이재명 기자
이재명 기자
청와대 본관 접견실에는 김학수 화백이 그린 ‘능행도’라는 그림이 걸려 있다. 조선시대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가 있는 수원으로 행차할 때 모습을 그린 그림이다. 수백 명에 이르는 수행원이 끝도 없이 펼쳐진 대작이다. 여기에 개가 7마리 그려져 있다고 한다. 이 개를 모두 찾으면 청와대를 떠날 때가 됐다는 우스갯소리가 있다. 청와대 근무자들 사이에서 전해 내려오는 속설이다.

2년여간 청와대를 출입했지만 아쉽게도 능행도를 직접 보지 못했다. 청와대의 한 행정관이 “벌써 개 5마리를 찾았다”며 즐거워하던 모습이 떠오를 뿐이다. 청와대를 떠나고 싶어서라기보다 고된 청와대 근무에서 찾은 작은 즐거움이었을 것이다. 필자는 ‘능행도 숨은 그림 찾기’의 기회를 얻지 못한 채 이달 국회로 출입처를 옮겼다. 이참에 그동안 청와대를 출입하면서 느낀 생각을 정리하고 싶다.

개헌을 놓고 갑론을박이 있지만 현행 5년 단임제의 수명이 다했다는 데는 큰 이견이 없을 것이다. 무엇보다 국정 방향과 어젠다가 5년마다 리셋(초기화)되는 게 가장 큰 문제다. 앞선 정부의 숱한 고민과 시행착오의 결과물은 흔적조차 찾을 수 없다. 그러니 발전이란 게 없다. 차기 정부에서 국책사업이 혈세 낭비로 매도당하지만 않아도 다행이다.

박근혜 정부도 2년 반 뒤 ‘흔적 지우기’의 대상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청와대는 고용과 복지 서비스를 한곳에서 지원하는 ‘고용플러스센터’의 이름을 ‘행복센터’로 지으려 했다. 하지만 차기 정부가 ‘행복’ 지우기에 나설 것을 염려해 무난한 이름을 택했다. 현 체제에선 모든 정부가 ‘모래성 정부’나 다름없는 것이다.

더욱이 ‘야당 결재법’이라는 국회선진화법 아래서 어느 정권도 개혁 드라이브를 강하게 걸 수 없다. 그럴수록 야당에 줘야 할 반대급부만 커진다. 공무원연금법 개정 과정에서 대한민국의 개혁 역량은 민낯을 드러냈다. 노동시장 구조개혁도 국회 터널을 거치면 용두사미로 끝날 것이란 전망이 적지 않다.

박 대통령은 당초 공무원연금법에 대해 거부권 행사를 검토했다고 한다. ‘맹탕 개혁’이란 비판이 빗발칠 때다. 하지만 참모들이 극구 말렸다. 공무원연금법에 대한 거부권 행사는 새누리당과의 결별을 의미했다. 그러다가 국회법 개정안이 넘어오자 박 대통령은 폭발했다. ‘유승민 사퇴’로 여당에 대한 장악력을 높였지만 박 대통령의 ‘여왕 이미지’는 굳어졌다. 철학자 니체는 “가치는 그것을 통해 무엇을 얻느냐가 아니라 그것을 위해 어떤 대가를 치러야 하는가에 달려 있다”고 했다. 박 대통령이 치른 대가보다 더 많은 것을 얻었는지 의문이다.

물론 박 대통령의 통치 스타일에도 문제가 있다. 하지만 정치의 비효율과 충돌의 일상화는 다분히 구조적이고 필연적이다. 박 대통령은 처음부터 국가 시스템을 바꾸는 데 전력했다. 하지만 정치 체계라는 근본적인 변화 없이 국가 시스템을 바꿀 수 없다는 건 이제 박 대통령이 누구보다 뼈저리게 느낄 것이다. 박 대통령이 내년 총선에 앞서 개헌을 포함한 정치 체계 변화의 로드맵을 제시해주길 바란다. ‘희망의 새 시대’의 밑그림을 다시 그릴 책무가 박 대통령에게 있기 때문이다.

그러려면 정부의 한계부터 인정해야 한다. 이제 정부가 아무리 많은 예산을 쏟아부어도 경제성장률을 0.1%포인트 올리는 것도 버겁다. 그만큼 결과물을 내는 노력 못지않게 정부의 고민을 나누고 공감대를 만드는 과정이 중요해졌다. 박 대통령이 적극적으로 ‘소통 행보’에 나서야 하는 이유다. ‘광복절 특사’를 실시할 15일이나 임기 반환점인 25일 등에 맞춰 기자회견을 여는 방안도 검토할 필요가 있다.

다음은 청와대 내부 시스템의 변화다. 이명박 정부 당시 국정홍보처를, 박근혜 정부 들어 특임장관을 없애면서 정무와 홍보 기능이 취약해졌다는 지적이 적지 않았다. 하지만 청와대 내부에서 가장 아쉬워하는 대목은 따로 있다. 바로 민정1비서관실의 폐지다. 이명박 정부 당시 각종 여론과 정보를 취합해 보고하던 곳이다. 이것이 민정의 순수 기능이다. 현 정부에선 사정 업무를 담당하던 민정2비서관실과 통합됐다.

옛 민정1비서관실에는 국가정보원과 검찰, 경찰, 국세청 등 정보를 다루는 각종 국가기관의 중견간부가 파견 나와 있었다. 이들은 소속 기관의 최고급 정보를 취합하는 동시에 정치 경제 종교 시민단체 등 각 분야를 나눠 맡았다. 여기에 지역을 분담해 해당 기관과 분야, 지역의 각종 정보와 여론을 촘촘히 체크해 대통령에게 매일 직보했다.

현재도 민정비서관실 안에 민심반이 있다. 하지만 민정비서관실이 검사 중심으로 운영되면서 ‘민정은 사라지고 사정만 남았다’는 볼멘소리가 나온다. 지난해 ‘정윤회 동향’ 문건 파문 이후 민심반에서 경찰 출신은 아예 빠졌다. 국무총리실 민정비서관실에도 총경급 간부가 파견된 것과 비교하면 정상적 운영이 아니다. 민정 기능이 약화되면서 대통령에게 정확한 정보와 민심이 전달되고 있느냐는 의문마저 제기되는 상황이다.

박 대통령은 2004년 11월 한나라당 대표 시절 당 출입기자들을 서울 강남구 삼성동 자택으로 초대했다. 이 자리에서 이런 꿈을 밝혔다. “정치를 그만둔 뒤 여행 중 만나는 사람들이 된장국이라도 건네는, 그런 정치인이 되고 싶다.” 좀 더 낮은 자세로 보폭을 넓힐 때다.

이재명 기자 egija@donga.com
#청와대#능행도#박근혜#흔적 지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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