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례 52명중 39명 “지역구 출마”… 본회의 출석률 70%로 뚝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8월 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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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의도 정치 ‘3대 고질병’ 고쳐라]<上>‘지역구 징검다리’로 전락한 비례대표

《 20대 총선을 8개월 앞둔 여의도 정치권은 다시 ‘총선 룰’을 놓고 날카롭게 대치하고 있다. 하지만 국회를 바라보는 국민들의 시선은 싸늘하다. 화려한 수사의 이면에 자기 밥그릇 챙기기에 골몰하는 정치권에 대한 불신이 여전하기 때문이다. 최근 한국갤럽 여론조사에서 ‘국회가 역할을 잘 수행하고 있다’고 답한 응답자는 5%에 그쳤다는 것은 여야에 대한 사망 선고나 다름없다. 전문성과 소수자 배려를 명분으로 내건 비례대표 의원은 사실상 ‘지역구 의원이 되기 위한 징검다리’로 변질됐다는 지적이 많다. 의원 정수 확대를 논의하기 이전에 여야 스스로 국회가 그동안 제 기능을 했는지 참회록을 써야 할 판이다. 총선 룰을 정해야 하는 이 시점에 여의도 정치의 ‘3대 고질병’을 긴급 진단해봤다. 》

새누리당 비례대표 A 의원은 지난달 24일 추가경정예산(추경)안 처리를 위한 국회 본회의에 ‘지각’ 출석했다. 자신이 출마하려는 지역의 사무실에서 연 ‘민원의 날’ 행사가 오후 3시에야 끝났기 때문이다. 원내지도부로부터 오후 2시 본회의 개최를 공지받았지만 자신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표를 줄 지역 주민이라고 판단했다. 그는 지역 업무를 마친 뒤에야 서울행 고속철도(KTX)에 몸을 실었다. 본회의장에 도착했을 때는 추경 안건 65개 중 31개가 이미 통과된 상태였다.

○ 비례대표는 지역구 징검다리용?

20대 총선을 8개월여 앞둔 비례대표 의원들의 마음은 이미 콩밭으로 간 지 오래다. 4년마다 되풀이되는 ‘국회 4년 차’ 증후군이기도 하다. 동아일보가 2일 19대 국회 비례대표 의원 52명의 20대 총선 출마 의사를 파악한 결과 75.0%인 39명이 지역구로 출마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출마에 무게를 두고 검토하고 있는 의원 6명까지 포함하면 86.6%나 된다.

지역구를 선택해 출사표를 낸 비례대표 의원들은 평일, 주말 가릴 것 없이 지역구에서 산다고 한다. 지역을 아직 고르지 못한 경우에는 지역구별 유불리를 따지느라 부심하고 있다.

새정치민주연합 문재인 대표에게 지역구(부산 사상)를 물려받은 배재정 의원은 홈페이지에 공개된 일정만 봐도 지난달 7차례 이상 이 지역을 찾았다. 공교롭게 올 들어 본회의 출석률은 뚝 떨어졌다. 참여연대 의정감시센터에 따르면 지난달 9일 현재 70.0%로, 지난 3년간의 본회의 평균 출석률(94.9%)에 비해 상당히 저조하다.

‘청년비례대표’로 19대 국회에 입성한 새정치연합 김광진 의원은 지난해 11월 전남 순천, 올해 1월 곡성에서 의정보고회를 열었다. 김 의원은 지난해 일찌감치 전남 순천-곡성을 지역구로 골랐다. 의정보고회는 보통 지역구 의원들이 예산 확보, 민원 해결 등 업적을 홍보하는 자리인데 비례대표 의원이 개최한 것은 이례적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비례대표 의원이 지역구 의원들처럼 ‘지역 예산 챙기기’에 나서기도 한다. 태릉선수촌장을 지낸 새누리당 이에리사 의원은 이번 추경안 심사를 앞둔 6월 국회 예산결산특별위원회 위원으로 보임돼 ‘대전 예산’을 챙겼다. 또 대전 중구에 사무실을 내고 자신의 활동상을 담은 보도자료까지 내기도 했다.

○ 대의명분은 없고 오로지 당선 가능성만

출마 지역을 택하는 기준으로 지역구도 타파 등 대의명분이나 출신 배경보다 당선 가능성을 염두에 두는 사례도 적지 않다. 새정치연합 비례대표 21명 중 ‘여당 텃밭’으로 분류되는 영남 지역에 출마할 의사를 밝힌 의원은 홍의락(대구 북을), 배재정 의원(부산 사상) 정도에 그쳤다.

김현 의원이 최근 사무실을 열고 총선 채비에 들어간 경기 안산 단원갑은 19대 총선에서는 새누리당 김명연 의원이 당선된 곳. 그러나 이 지역은 15대에 선거구가 신설된 이래 18대까지 현재의 야당 출신이 내리 당선된 ‘야당 텃밭’으로 꼽힌다.

새누리당 비례대표 의원들도 ‘안전하게 당선을 노릴 지역’을 잡으려고 몸부림치는 것은 비슷하다. 이미 출마를 선언한 21명 중 여당의 불모지인 호남 지역에 출사표를 낸 의원은 주영순 의원(전남 무안-신안) 한 명뿐이다.

“비례대표제를 도입해 전문성을 수혈한다고요? 소가 웃을 일입니다. 국회 입성 첫날부터 그 사람들(비례대표)은 다음 선거에 출마할 지역구를 보러 다니느라 바빠요. 당연히 당 지도부 눈치를 봐야죠. 기껏 활동하는 것도 자기가 대표하는 직역(職域)의 민원 창구 정도죠.” 새정치연합의 한 중진 의원은 최근 기자에게 비례대표 얘기가 나오자 이같이 말하며 한숨부터 쉬었다.

새누리당의 한 수도권 의원도 “지금 우리 정치의 모습을 보면 비례대표 의원들은 없어도 된다”며 “우리가 그 사람들 지역 찾아가는 데 4년 동안 돈 주면서 도와줘서야 되겠느냐”고 꼬집었다. 비례대표가 지역구 의원으로 나가기 위한 징검다리에 불과하다는 얘기다.

○ “임기 반환점 돌며 취지 잃어”

새정치연합은 권역별 비례대표 도입을 역설하고 있다. 하지만 권역별 비례대표는 비례대표 후보 선출 단위를 중앙당에서 6개 권역으로 바꾸는 것일 뿐 비례대표 제도가 작동되는 본질은 바뀌지 않는다는 지적이 나온다.

최창렬 용인대 교육대학원 교수(정치학)는 “지금처럼 계파 안배로 비례대표를 선발하고, 그 비례대표가 들어오자마자 지역을 찾아다니면 수를 늘리는 게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면서 “영혼 없는 의원만 양산하는 꼴”이라고 지적했다.

새정치연합 혁신위원회 내부에서도 현재의 비례대표 행태에 제동을 걸어야 한다는 의견이 나왔다고 한다. 익명을 요구한 한 혁신위원은 “비례대표 의원이 다음 선거에서 지역에 출마할 경우 사지(死地) 출마를 명문화하는 등의 제도적 보완책이 있어야 한다는 주장도 있었지만 혁신안에 담지는 못했다”고 전했다.

여야가 ‘비례대표 연임 불가’ 규정을 탄력적으로 운영해야 한다는 견해도 있다. 김형준 명지대 인문교양학부 교수(정치학)는 “비례대표가 전문성을 통해 평가받을 수 있는 길을 열어줘 제도가 왜곡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홍수영 gaea@donga.com·한상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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