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규슈 ‘백제마을 난고손’ 한글 도로 표지판 따라 가보니…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7월 8일 14시 4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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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교 50년, 교류 2000년 한일, 새로운 이웃을 향해]<14회>백제 마을 난고손

일본 규슈 남동쪽 미야자키 시에서 차로 2시간 정도 달리면 ‘난고손(남향촌·南鄕村)’이라는 작은 마을을 만난다. 협곡 사이로 흐르는 하천을 따라 굽이굽이 나 있는 좁은 도로를 따라가다 보면 현실이 아닌 신화 속 공간으로 들어선 듯한 착각에 빠질 정도로 경치가 좋다.

마을이 가까워지면 일본 땅이지만 ‘백제마을 난고손’이라는 한글 도로 표지판이 자주 보인다. 인구 2300여 명에 불과한 이 작은 마을은 역사 속 백제를 현재로 만드는 ‘백제마을 만들기’운동이 한창이다. 한국도 아닌 일본 땅에서, 그것도 작은 산골 마을에서 우리 조상들 마을을 재현하겠다는 운동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이 놀랍다는 생각을 하며 마을 입구로 들어섰다.

●백제마을로 거듭나자

마을 입구에는 돌장승까지 서 있었다. 산천도 비슷해서 얼핏 여기가 한국인지 일본인지 구분이 안 갔다. 마을의 모든 이정표와 교통 표지판이 한글로 되어있고 한글 공부방 김치 공장까지 있었다.

우리도 마찬가지이지만 일본 지방 도시들도 농사지을 젊은이들이 없고 아기 울음소리가 그친 지 오래이다. 난고손도 인구가 감소하고 고령화가 진행돼 마을 존립까지 걱정해야 하는 상황이 됐다.

그러다 1980년대 후반 일본 전역에서 경쟁적으로 ‘마을 만들기’ 운동이 펼쳐졌다. 각자 특징을 살려 자기 고장을 전국에 알리자는 움직임이었다. 난고손 주민들 걱정은 더 커졌다. 내세울만한 것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던 중 마을 회의에서 “백제를 살리자”는 아이디어가 나왔다. 미야자키 현 난고지소에서 기획관광과장으로 일하다 2007년 퇴직 후 관광해설사로 활동하고 있는 하라다 스미오(原田須美雄) 씨는 당시 회의 분위기를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무엇으로 우리 마을을 알릴 것인가 하는 주제로 열린 회의였는데 다들 이렇다할 묘책이 나오지 않아 고심하고 있었다. 그때 60대 초반의 촌장이 ‘우리 마을에 1300여 년 전 백제왕에 대한 전설이 내려오고 있지 않느냐. 백제왕을 모시는 신사도 있다. 백제를 살려 마을부흥운동을 하자’고 제안했다. 다들 맞아, 우리가 왜 그동안 백제를 잊고 살았지 하는 표정들이었다.”

주민들의 이 ‘다소 엉뚱한’ 시도는 출발부터 난관에 부딪혔다. 백제에 대해 제대로 알고 있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고민 끝에 내린 결론은 ‘현장으로 가보자’였다. 하라다 씨를 포함한 마을 대표 3명은 백제의 마지막 도읍이었던 충남 부여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한국어도 모르고 전문지식도 없는 일본 노인들이 찾아와 백제마을을 만들겠다고 하니 당황한 쪽은 부여 시청 공무원들이었다. 하지만 이내 이들의 진정성을 믿고 적극 도와주기 시작했다.

우선 부여 왕궁터에 있었던 객사(客舍·나그네들을 묵게 했던 숙소)를 실제 크기로 복원해 ‘백제관’을 세웠다(1990년). 주일 한국대사관과 후쿠오카 총영사관의 도움으로 설계도를 얻어 실물과 동일하게 만들었다. 단청도 한국에서 온 장인들이 직접 했고 기와와 백제 전통 문양이 찍힌 보도블록도 한국에서 특별 주문해 온 것들이다. 부여 출신 김종필 전 총리는 직접 현판 글씨를 썼고 낙성식 때에는 김덕수 사물놀이 공연을 주선하기도 했다. 이곳 미야자키현 난고지소장 사무실에는 김 전 총리가 1990년 마을을 방문했을 때 선물한 대형 인삼주도 전시돼 있었다.

●神으로 받들어진 백제왕

그렇다면 이 마을에 전해 내려오는 백제 전설의 주인공은 누구일까. 백제왕족 정가왕(禎嘉王) 부자(父子)이다.

이들은 지난 13회에 소개된 백제신도시 히라가타를 만든 의자왕의 아들 선광왕처럼 663년 백강 전투에서 패하고 왜(倭)로 건너온 백제 왕족이다. 당시 왜의 야마토(大和) 정권은 이들을 혈육처럼 맞이한다. 일본서기에는 “백제인 400여 명을 오미국 간자키 군(지금의 오사카 일대)에 거주하도록 했으며…도래한 2000여 명에게 3년간 관식(官食)을 급여했다”는 문구가 나오는데 정가왕 부자는 이 집단에 섞여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정가왕 일행은 처음엔 나라와 오사카 인근에 머물다 9년 뒤인 672년에 정권 내부 권력투쟁으로 내란이 일어나자 배를 타고 피난을 떠난다. 가던 중 태풍을 만나 정가왕은 이곳 난고손에 정착하고 아들 복지왕은 90km 가량 떨어진 히키(比木)에 정착하게 된다. 하지만 이내 반란군의 추격으로 정가왕은 난고손에서 왜 호족 7개 가문의 지원을 받고 전투를 벌이지만 화살에 맞아 목숨을 잃는다. 급하게 소식을 듣고 달려온 아들 복지왕이 반란군을 제압한다.

정가왕의 시신은 그를 도왔던 호족들과 함께 마을 입구에 묻혔다. 이후 마을 사람들은 각각 정가왕을 신으로 모시는 미카도(神門) 신사와 복지왕을 신으로 모시는 히키 신사를 세운다.

정가왕 부자는 어떤 사람들이었기에 마을 주민들이 신으로까지 받들게 됐을까. 난고지소마을 소개 자료에는 이렇게 적혀있었다. ‘백제인들은 의학과 농업, 문화의 정취가 높았다. 왕족의 인격과 식견을 접한 마을 사람들이 경탄과 함께 존경과 동경의 마음을 품었기에 신으로 받들게 됐다.’

미카도 신사를 직접 찾아가 보았다. 이곳은 마을 사람들에게 거의 신성시된 공간이었다. 난고지소 아라타 겐이치(荒田健一) 국제교류 담당직원은 기자에게 다음과 같은 일화를 들려줬다.

“1980년대 말 정가왕 무덤 인근 논밭을 소유한 땅 주인이 찾아와 하는 말이 ‘나쁜 일만 계속 생긴다. 무덤 근처에서 농사를 짓다보니 그런 것 같다’며 관청에서 땅을 사주면 어떻겠느냐는 거였다. 마침 방치됐던 무덤을 정비할 계획도 있던 차여서 땅을 사들였다. 신기하게도 땅주인이 그때부터 ‘일이 잘 풀린다’며 고마워했다.”

실제로 신사에는 많은 주민들이 참배를 하고 있었다. 주변 나무들도 족히 300~400년은 된 고목들이었다. 찬찬히 둘러보니 신사 뒤로 붉은 빛이 감도는 작은 목조 건물이 눈에 띄었다. 아라타 씨는 “저게 진짜 ‘미카도 신사’로 추정되는 건물”이라며 “국가중요문화재로 지정돼있다”고 소개했다. 신사에 쓰인 나무도 이세신궁 자재와 같은 것으로 밝혀졌다. 구니노베 난고지소장은 “일본 옛 문헌에 이세신궁(용어설명)을 만들 때 쓰던 나무들이 일본 각 지역으로 보내졌다는 기록이 나오는데 미카도 신사도 그 나무로 지어진 매우 귀한 건물 중 하나”라며 “지붕 짜는 기법도 무려 1000여 년 전 나라(나라) 지역 건축물 기법과 같은 것으로 확안돼 국가 문화재로 지정됐다”고 전했다.

미카도 신사 조사보고서(2002년)에 따르면 신사 창건 시기는 718년으로 추정된다. 붉은 색 건물은 그 이후에 지어진 것으로 보이는데 여기서 구리거울 등 정가왕의 유물(24점)들이 쏟아져 나왔다. 전설로만 내려오던 정가왕이 실존 인물이었음을 보여주는 물적 증거가 나오자 일본 사회가 술렁였다.

●따뜻한 마음의 교류

이곳 주민들은 지금도 매년 음력 12월이 되면 ‘사와스마츠리’(師走祭)라는 축제를 열고 미카도 신사에서 히키 신사까지 90㎞를 걷는 행사를 한다. 1년에 한번이라도 정가왕 부자의 영혼을 만나게 해주자는 취지이다. 일본 문화청은 이 축제를 1991년 무형민속 문화재로 지정했다.

또 정가왕이 남긴 유물 24점을 특별 관리하기위해 1996년 나라현 동대사(東大寺) 왕실 유물 창고인 정창원을 본뜬 ‘서정창원(西正倉院)’까지 세웠다. 주민들은 ‘서정창원’을 세우느라 빚을 내기도 했지만 관광객들이 많이 찾아온 덕분에 입장료 수입만으로 부채를 다 갚을 수 있었다고 한다. 난고손의 백제마을 만들기는 산토리 문화상 등 22개의 지역발전공로상을 받기도 했다.

기자는 이곳에서 백제인으로 환생한 듯한 경험을 했다. ‘한일 교류 2천년, 새로운 미래를 향하여’의 저자 정구종 일본연구센터 소장(동서대 석좌교수)은 “언어와 풍습이 다른 이국 출신 왕족을 서슴없이 받아주었던 옛 난고손 주민들의 따뜻한 마음과 그런 선조들의 뜻을 되새겨 백제를 오늘날에 환생시킨 주민들의 열정이야말로 한일 우정과 협력이 만드는 미래모습을 보여주는 구체적 사례”라고 말했다.

:이세신궁:

혼슈 미에현 동부 이세(伊勢)에 있는 신궁. 도쿄 메이지신궁, 오이타의 우사 신궁과 더불어 3대 신궁으로 불린다. 매년 참배객이 600여만명에 달한다. 이세신궁의 가장 큰 특징은 20년에 한 번씩 건물을 신축하고 이전 건물을 헐어버린다는 것. 나무를 소재로 최고(最古)의 건축 양식으로 짓기 때문에 건물 연한이 짧기 때문이라고 한다.

15회는 ‘철 말 토기를 전하다’ 입니다’

난고손=성동기 기자 espri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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