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 왕족은 고대 일본인들이 이상향으로 삼던 선진국 왕족”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6월 22일 17시 5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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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교 50년, 교류 2000년 한일, 새로운 이웃을 향해]<7회>무령왕 탄생지를 가다

가카라시마는 후쿠오카에서 한 시간 동안 지하철을 타고 가라쓰까지 온 뒤 다시 버스로 갈아타고 요부코 항으로 와 여객선을 타고 20분 정도 가야한다.

항에 도착하니 사카모토 쇼이치로(坂本 正一郞) 백제무령왕국제네트워크협의회 부회장이 기자를 맞아 주었다. 이 단체는 백제 문화와 무령왕을 매개체로 한일 민간교류를 활성화하기 위해 한일 민간인들이 자발적으로 만든 단체다. 사카모토 부회장에게 “여객선에 탄 사람이 기자밖에 없었다”고 했더니 “본래 평소에도 사람이 없다”는 답을 돌아왔다.

●거친 바다 동굴에서 태어난 무령왕

둘레가 약 12㎞인 이 섬 인구는 불과 108명. 어업이 번창했던 1952년엔 560명이 살기도 했지만 지금은 거의 떠났다고 한다. 남아 있는 사람들은 주로 도미와 오징어잡이에 종사한다. 섬에 뚜렷한 관광 자원도 없다보니 낚시꾼들이나 오는 섬이라고 주민들은 전했다.

배에서 내리자마자 ‘百濟武寧王生誕地(백제무령왕생탄지)’라고 새겨진 커다란 돌 기념비가 보였다. 2006년 6월 25일 충남 공주와 일본 가라쓰 시민들이 모금해 세운 높이 3.6m의 기념비는 무령왕릉 입구의 아치 모양을 본 따 만들었다. 돌은 한국 최고 화강암 산지인 전라북도 익산에서 다듬어 배로 실어왔다고 한다.

기념비를 지나 15분 정도 더 걸어가자 오늘의 답사 목적지인 무령왕이 태어났다는 해안가 동굴이 나왔다. 섬사람들은 동굴이 있는 해변을 ‘오비야우라(オビヤ浦)’라고 불렀다. 오비는 일본어로 기모노 등을 묶는 허리띠를 의미하니 허리띠를 풀고 아이를 낳은 포구란 뜻이다.

오랜 기간 파도에 부딪친 탓인지 벼랑 아래쪽이 약 2m 정도만 깎여 들어간 작은 굴이었다. 사카모토 부회장은 “예전에는 좀 더 깊었지만 풍화 작용으로 위가 무너져 막혔다”고 했다. 동굴 안 판자 팻말에는 ‘百濟第二十五代武寧王生誕の地(백제 제25대 무령왕이 태어난 곳)’라는 글이 적혀 있었고, 그 앞에는 누가 갖다 놓았는지 작은 화분과 술잔 몇 개가 놓여 있었다.

생각보다 너무 작아서 “여기가 무령왕 탄생지 맞느냐”고 묻자 사카모토 부회장은 고개를 끄덕이며 “이 섬에 배가 정박하고 비를 피할만한 곳은 이 동굴 밖에 없다”고 했다.

동굴과 바다는 거친 자갈밭을 사이에 두고 불과 5m 정도 떨어져 있었다. 태풍이라도 불때면 파도가 동굴 안까지 들어올 것 같았다. 지금으로부터 무려 1500여 년 전 이 낯선 땅 거친 야생 동굴에서 혹독한 산고(産苦)를 치르며 아이를 낳았을 백제국 왕비 생각에 가슴 한 구석이 짠했다. 이렇게 춥고 어두운 동굴에서 갓 세상 밖으로 나온 무령왕은 또 얼마나 두려웠을 것인가.

●얼마나 왜국과 친한 관계였으면

무령왕이 이곳에서 태어나 백제로 다시 돌아가 훗날 왕위에 올랐다는 게 신기하게 느껴졌다. 지금도 건강한 성인남자도 힘든 뱃길에 동생(곤지)이 탄 배에 임신한 자신의 왕비를 태웠던 무령왕의 아버지 개로왕은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랬던 것일까…선뜻 이해가 안 갔다.

하지만 뒤집어 생각하면 해로(海路)가 그만큼 안전했다는 뜻도 되고 무엇보다 왜(倭)와의 친선관계가 지금 우리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깊었기 때문 아니었을까 하는 확신이 들긴 했다.

동굴을 나와 50m 정도 걸어가니 갓 세상 밖으로 나온 무령왕이 첫 목욕을 했다는 우물이 나왔다. 계곡 옆에 깊이 수십cm 구덩이를 파놓고 판자 몇 개로 대충 둘러친 형태를 띠고 있었다. 물맛이 어떨까 궁금해 떠서 마셔 보니 특별한 맛은 없었다.

가카라시마는 침체돼 가는 섬 경제를 살리기 위해 백제왕이 태어난 곳이란 점을 부각시켜 한국 관광객들을 끌어 들이고 싶어 한다. 섬에선 2002년부터 매년 6월 첫 번째 토요일에 한일 관계자들이 참가하는 무령왕 탄생제가 열린다.

14회인 올해에도 한국에서 건너간 31명을 포함해 200여명이 모였다. 올해는 첫 번째 토요일이 현충일임을 감안해 7일에 행사가 열렸다. 섬이 속한 가라쓰 시내에선 무령왕 관련 공연과 연극도 진행됐다. 한국과의 인연을 계속 이어가기 위한 노력에 고맙고 미안하고 또 친근감이 느껴졌다.

문제는 교통이었다. 후쿠오카에서 지하철 버스 여객선을 갈아타고 와야 한다. 다른 관광자원이나 편의시설도 별로 없는데 백제왕이 태어난 동굴을 구경하겠다고 한국 관광객이 한나절을 투자하기가 쉽지 않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바다 건너를 바라보니 무령왕이 태어난 지 꼭 1000여년 뒤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한반도를 바라보며 대륙진출의 꿈을 꾸었다는 히젠 나고야성이 있는 언덕이 보였다. 자신을 포함해 왕실 가족들이 수시로 오갈만큼 가까웠던 왜와 먼 훗날 후손들이 동아시아 대 전쟁을 펼치게 될 줄 무령왕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물이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듯이 역사는 국력이 강한 쪽에서 약한 쪽을 향해 영향력이 확장되게 마련이다. 동서고금을 관통하는 국제정치의 냉엄한 현실이다.

●백제 부흥을 이끈 왕

무령왕은 백제의 부흥을 이끈 왕이다. 당시로서는 드물게 장수(62세)하면서 외교 군사 경제 문화 등 모든 방면에서 백제의 비약적인 성장을 이끌어 냈다. 종교와 사상 등 정신적인 측면에서도 커다란 발전이 있었다. 중국 남조를 통해 수입된 유학과 도교사상은 백제에서 다듬어져 일본으로 전해졌다. 국가를 운영할 제도와 이념에 목말라하던 일본의 지배층들은 백제를 통해 수혈되는 고급 학문과 사상에 크게 의지했으며 이러한 사조는 성왕 대까지 이어진다(권오영 저 ‘무령왕능’).

당시 백제와 왜의 긴밀한 교류는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각종 유물로도 확인됐다. 우선 시신을 모신 목관의 재료가 일본에서만 나는 금송(金松)이었다. 금송은 햇빛이 솔잎에 비칠 때 황금빛을 낸다고 해 붙여진 이름인데 일본어로는 ‘고야마키(高野¤)’라고 한다. 곧게 잘 자랄 뿐만 아니라 내수성과 내습성이 좋아 일본에서는 후지와라 궁 헤이조궁 등의 중요 건축물 자재로 이용되었으며 고대에는 귀족층의 목관 재료로 널리 사용되었다.

실제로 무령왕이 태어난 동굴 바로 위쪽 산허리에는 빼곡히 우거진 잡관목을 걷어내고 심은 수령 2~3년 정도 된 나무 한 그루가 눈에 띄었는데 나무 앞에 ‘고야마키(高野¤)’라고 적힌 작은 팻말이 있었다. 권오영 교수는 책 ‘무령왕릉’(돌배게)에서 이렇게 적고 있다.

‘고대 일본인은 석관을 선호했고 목관을 사용하더라도 백제 것과는 달랐다. 따라서 무령왕 부부의 목관이 일본에서 제작되었다고 보기는 곤란하다. 통나무나 약간의 가공을 거친 상태로 백제로 들어왔을 것이다. 목관을 제작하려면 운반 후에도 건조, 가공, 못과 관 고리의 제작, 옻칠, 비단 제작 등 여로 공정이 필요하므로 오랜 시간이 소요되었을 것이다. 또한 주인공이 돌아가신 뒤 곧바로 관에 모셔진 채 무덤 안으로 이동하였을 터이므로 생전에 미리 관을 만들어 두었을 것이 틀림없다. 따라서 당시 백제에서는 일본에서 금송을 입수하여 관리하는 체계가 이미 완성되었다고 보아야 한다.’

이밖에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둥근고리자루칼(둥글게 처리된 끝부분에 끈을 묶어 손목에 감싸 전투할 때 떨어뜨리지 않도록 고안된 칼)로 불리는 ‘환두대도(環頭大刀’나 청동거울도 일본 내 고대 무덤에서 거의 비슷한 것들이 발견되어 백제와 왜와의 긴밀한 교류를 짐작케 했다.

‘백제는 일본의 기원인가’의 저자 김현구 선생은 책에서 “6세기 양국은 혈연적 관계로 묶였었다”면서 “개로왕의 동생 곤지 뿐 아니라 여러 명의 백제 왕자들이 일본에 건너가 일본의 왕녀와 결혼했을 가능성이 큰데 이는 당시 백제 왕들이 일본인들이 이상향으로 삼던 선진국 최고 신분의 인물들이었기 때문”이라고 전했다.

일본서기 : 720년에 편찬된 일본의 역사서. 일본의 건국 신화로부터 41대 지통천황(持統天皇)이 사망한 697년까지 역사를 연대순으로 기록하고 있다. ‘고사기’와 더불어 일본 고대사 연구의 핵심 사료이다.

8회는 무령왕의 후손 간무천황 이야기입니다.

가카라시마=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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