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시·지리·인화로 본 반기문 대망론

  • 주간동아
  • 입력 2015년 5월 25일 13시 0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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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름장어’의 전략적 모호성 언제까지 통할까

2017년 대통령선거(대선)는 역대 대선과 조금 다르게 진행될 개연성이 있다. 지금까지 대선이 여야 차기 대권주자 경쟁구도로 일찌감치 굳어졌다면, 2017년 대선은 유력 차기 대권주자가 혜성처럼 등장할 가능성이 높다는 점에서다.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사진)의 임기 마감일은 2016년 12월 31일. 대선을 치르는 2017년 초 반 총장은 10년 간의 유엔 사무총장 임기를 마치고 귀국길에 오르게 된다. 한국인 최초로 국제무대에서 국가원수급인 유엔 사무총장을 맡아 10년간 유엔을 이끌며 세계평화에 기여한 그의 귀국은 말 그대로 ‘금의환향’이 아닐 수 없다. 그의 귀국 시점에 맞춰 10년간 유엔 사무총장으로서 그가 해온 치적을 조명하는 언론 보도가 잇따를 것이다. 방송들이 반 총장의 10년 성과를 조명하는 다큐멘터리를 제작하는 것도 예측 가능한 시나리오다. 어찌됐건 임기를 마치고 귀국하는 그에게는 누구도 넘볼 수 없는 ‘글로벌 지도자 이미지’가 후광처럼 따라붙게 된다.

누구도 따라오지 못할 글로벌 지도자 이미지

‘반기문 대망론’은 이처럼 반 총장 본인의 대권에 대한 의지와 무관하게 차기 대선과 맞물려 그가 임기를 마치고 귀국하는 ‘시점’과 더 큰 관련이 있다. 천하 패권을 움켜쥐려는 이가 갖춰야 할 세 가지 요건인 천시(天時), 지리(地利), 인화(人和) 가운데 천시가 반 총장에게 열릴 가능성이 높다고 보는 것이다.

지리적 이점도 반 총장이 갖췄다고 보는 시각이 많다. 반 총장은 충북 음성 출생. 유권자 수나 경제 규모 등 지세(地勢)로 보면 충청, 그것도 충북 출신이란 점은 결코 유리한 요소가 아니다. 그러나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불리한 요소는 유리한 점으로 반전될 수 있다. 1987년 직선제 개헌 이후 치른 역대 대선은 영남과 호남을 주축으로 한 동서 지역 대결구도였다. 92년 대선에서는 3당 합당 이후 TK(대구·경북)가 지지하는 PK(부산·경남) 후보로 ‘우리가 남이가’라는 신조어까지 낳으며 김영삼 대통령이 당선했고, 97년 대선에서는 ‘지역등권론’을 앞세운 김대중 대통령이 DJP(김대중-김종필) 연대로 호남-충청 연합이 집권에 성공했다. 92년과 97년 두 차례 대선은 전형적인 동서 지역 대결구도로 치러졌다. 노무현 대통령을 탄생시킨 2002년 대선은 ‘호남이 지지한 영남 후보’라는 점에서 변형된 지역 대결구도였다. 그러나 2007년 대선과 2012년 대선에서 연거푸 TK 출신 이명박, 박근혜 두 대통령이 탄생함으로써 TK 외 지역의 ‘정권 창출’ 욕구는 그 어느 때보다 높다.

차기 대선을 2년 반 이상 앞둔 2015년 상반기에 새누리당 김무성, 새정치민주연합 문재인 등 여야 대표이자 유력 차기 대권주자의 출신 지역이 모두 PK라는 점은 김영삼 전 대통령 이후 자력으로 PK 출신 대통령을 배출하지 못한 PK 유권자의 권력 의지가 얼마만큼 강한지를 방증한다.

유권자 수가 많은 PK 출신 정치인이 차기 대선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하리라는 데 대해 많은 정치 전문가가 고개를 끄떡인다. 그러나 PK 출신이라는 점이 차기 대선 승리를 위한 필요조건은 될 수 있을지 몰라도 충분조건이 되기는 힘들다는 견해가 많다.

PK 출신 주자 간 경쟁으로만 대선이 치러진다면 대선후보를 배출하지 못한 지역이 대부분 소외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만약 차기 대선이 PK 주자 간 대결로 흐르면 TK와 호남, 충청, 강원, 제주 등 대선주자를 배출하지 못한 지역에서 제3의 후보를 선택할 공산이 크다는 전망이 나온다. 많은 정치 전문가가 다음 대선구도에서 어느 지역도 소외되지 않은 지역연합, 지역화합형 후보가 나올 가능성이 높다고 내다보는 이유다. 이종훈 시사평론가는 “충청대망론이나 수도권대망론 등 이른바 중원대망론이 제기되는 것은 다음 대선에서 전통적 동서 지역 대결구도를 벗어나 지역화합형 후보가 제3의 대안으로 나올 수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고 말했다. 충청 출신은 열성적 지지를 이끌어낼 지역 유권자 규모는 작지만, 그렇기 때문에 어느 지역에서도 거부감이 적어 역으로 지지율을 폭발적으로 상승시킬 여지가 있다는 장점을 지닌다. 충북 출신 기업인 L씨는 “다른 시도는 동서로 누워 있지만, 충북은 남북으로 길게 서 있어 대선 때마다 당락을 결정짓는 균형추 구실을 해왔다”며 “충북이 균형추에 머물지 않고 중심을 잡고 똑바로 서서 동서 어느 지역에도 치우치지 않는 균형 잡힌 권력을 만들어낼 수도 있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반 총장이 충청, 특히 한반도 남단의 정중앙에 위치한 충북 출신이라는 점은 그가 지리(地利)를 이미 확보하고 있다기보다 권력을 독점하지 않을 지역 출신이라는 점에서 역으로 더 큰 지리를 활용할 여지가 크다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천시와 지리를 갖췄다 해도 권력을 잡으려면 ‘인화’에 성공해야 한다. 10년간 한국을 떠나 있던 반 총장이 국내 지지기반을 구축하는 데 한계가 있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 여야 대표로 내년 총선에서 공천권을 행사하고, 이런저런 당 내외 인사로 자기 사람을 심어 대선후보 선출을 위한 경선을 준비해온 다른 주자들에 비해 반 총장이 불리한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반 총장이 ‘어느 누구의 사람도 아니다’는 점은 오히려 다음 대선에서 권력을 창출하고자 하는 욕구를 가진 이들을 한데 담을 수 있는 좋은 도구가 될 수도 있다. 2012년 대선 때 정국을 강타한 ‘안철수 현상’이나 2002년 대선 때 ‘노무현 돌풍’이 2017년 대선 때 ‘반기문 신드롬’으로 재현되지 말라는 법은 없기 때문이다.
지역화합형 대선후보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이 5월 19일 인천 연수구 송도컨벤시아에서 열린 ‘2015 세계교육포럼 개회식’에서 기조연설을 한 뒤 연단에서 내려오고 있다.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이 5월 19일 인천 연수구 송도컨벤시아에서 열린 ‘2015 세계교육포럼 개회식’에서 기조연설을 한 뒤 연단에서 내려오고 있다.
반 총장은 유엔 사무총장으로 앞으로 1년 7개월을 더 일해야 한다. 그런 그를 국내 언론들은 벌써부터 차기 대선주자로 대하려 한다. 유엔 사무총장이 아닌 차기 대선주자로 언급되는 순간 그의 스텝은 꼬일 수밖에 없다. 유엔 사무총장 같은 글로벌 지도자에게는 영호남, 충청 등 출신 지역에 따른 호불호가 거의 없지만, 차기 대선주자로 여겨지는 순간 출신 지역과 정치적 성향에 따라 호불호가 극명하게 갈리기 때문이다.

반 총장은 5월 19일 차기 대선 출마 가능성에 대한 질문을 받고 “유엔 사무총장으로서 8년 반 동안 재직하면서 국내 정치에 관심을 가진 적이 없다”며 “앞으로 어떤 여론조사기관에서도 저를 (대권주자로) 포함시키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조선일보’ 보도에 따르면 그는 “유엔 사무총장으로서 임기가 끝날 때까지 촌음을 아껴가며 국제평화와 안정, 인권보호, 기후 변화 등 인류를 위한 중차대한 일에 모든 힘을 바치겠다”며 “제가 훌륭하게 임기를 마치고 고국에 돌아와서 인사를 드릴 때 자랑스럽게 인사드릴 수 있고 여러분도 저로부터 보람을 느낄 수 있는 기회를 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고 한다.

‘유엔 사무총장으로서 남은 임기에 충실하고, 2017년 대한민국 차기 대선에는 불출마하겠다’고 한마디면 될 얘기를 이처럼 장황하게 한 이유는 뭘까. 반 총장이 청와대 외교보좌관으로 일하던 2004년 당시 대통령비서실장이던 새정치민주연합 문희상 의원은 반 총장에게 ‘기름장어’라는 별명을 붙여줬다. 대통령 해외순방 등 언론에 브리핑할 일이 많았지만 기자들의 유도질문에 넘어가지 않고 외교적 수사로 흠 잡히지 않으면서 잘 빠져나갔다고 해서 붙여준 별명이다.

차기 대선과 관련해 특유의 기름장어 화법으로 ‘전략적 모호성’을 유지하고 있는 반 총장의 속내는 뭘까. 이숙현 시사칼럼니스트는 “차기 대선과 관련해 벌써부터 자신의 속내를 밝히는 것보다 전략적 모호성을 유지하는 것이 앞으로 더 많은 선택지를 확보하는 길이기 때문”이라며 “차기 대권주자가 될 수도, 아니면 최소한 대선 때 캐스팅보트를 행사할 수도 있는데 벌써부터 대선 불출마를 선언해 스스로 가능성을 봉쇄할 필요는 없는 것 아니냐”고 말했다.

구자홍 기자 jhko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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