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일에 만난 사람]“전세버스 100여대 쫘악… ‘동대문 산악회’ 대단했죠”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5월 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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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악회 산증인, 최광식 서울등산연합회장

지난달 26일 광주 무등산을 오르는 도중 포즈를 취한 최광식 서울등산연합회장. 경북 봉화 청량산, 충북 보은 속리산, 경주 남산에 이어 그가 선정위원으로 참여했던 산림청 선정 100대 명산 중 올해 4번째로 찾은 산이다. 최광식 씨 제공
지난달 26일 광주 무등산을 오르는 도중 포즈를 취한 최광식 서울등산연합회장. 경북 봉화 청량산, 충북 보은 속리산, 경주 남산에 이어 그가 선정위원으로 참여했던 산림청 선정 100대 명산 중 올해 4번째로 찾은 산이다. 최광식 씨 제공
“1주일에 한 번 산행을 하면 당시 4만 원 정도 하던 대기업 과장 한 달 월급 정도가 남았어요. 한 달이면 대기업 과장의 월급 4배를 벌기도 했어요. 이제는 옛날 얘기죠.”

흔히 등산 인구 2000만 명 시대라고들 한다. 여론조사 기관 한국갤럽이 올해 초 발표한 결과에 따르면 국민들이 가장 좋아하는 취미 1위는 등산(14%)으로 2위 음악감상(6%)을 크게 앞섰다.

최광식 서울등산연합회장(68)은 가이드 산악회 관련 분야에서 46년째 일하고 있다. 스물두 살 때 ‘천우산악회’를 만들어 주말마다 등산객을 태우고 전국을 누볐다. 이후 ‘인디안산악회’로 이름을 바꾼 뒤에는 업계에서 ‘추장’으로 불리기도 했다. 등산 인구는 폭발적으로 늘어 말 그대로 등산이 ‘국민 취미’가 됐다. 그는 1980년대 초까지 등산 및 산악 인구는 160만 명 정도였다고 기억하고 있다. 그 사이 10배 이상 늘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오히려 가이드 산악회의 전성기는 지나갔다고 한다. 어째서 이런 현상이 생겼을까. 그의 회고담은 한국 등산 풍속의 한 단면을 보여준다.

동대문 시절의 추억

최 회장은 1969년 천우산악회를 열었다. 그는 “1967년 ‘마운틴코너’라는 산악회가 남대문에 생겼다. 내 기억으로는 그게 가이드 산악회의 효시다”라고 회고했다. 이때부터 하나둘 생겨나기 시작한 가이드 산악회를 보고 그도 창업을 결심했다. 경기 구리 출신인 그는 고향 인근 아차산 등을 자주 다녔다. 워낙 산을 좋아했던 그는 가이드 산악회의 성장 가능성을 알아봤다. 주말마다 버스를 전세 내 요금을 받고 전국의 명산으로 등산객을 안내했다. 전문 산악가이드가 앞장섰다. 이러한 형태의 가이드 산악회는 한동안 큰 인기를 끌었다.

창립 즈음 가이드 산악회 이용 요금은 당일 코스의 경우 1인당 700원 정도였다고 한다. 설악산 2박 3일 코스가 2500원 정도였다. 숙박비가 포함됐다. 당시 속초에서 김포까지 비행기 요금이 2400원 하던 시절이었다고 한다. 여러 대의 관광버스를 전세 내 대당 40여 명을 태우고 다녔다.

이러한 가이드 산악회는 1970년대 들어 1980년대까지 성장을 거듭했다. 한국의 경제가 성장하면서 여가 활동에 대한 국민의 관심이 높아졌고 손쉽게 즐길 수 있는 등산에 사람들이 몰린 것이다. 그는 1970년대 중반 한글날 연휴 때 설악산에 관광버스 16대에 사람들을 가득 태우고 다녀오기도 했다. 말 그대로 전성기였다.

이때의 가이드 산악회는 세칭 ‘동대문산악회’로도 불렸다. 그 이유는 가이드 산악회들의 상당수가 서울 동대문 인근에서 손님들을 태우고 떠났기 때문이다. 당시 동대문에는 커다란 주차장이 있었고 이 때문에 여러 대의 관광버스를 세워 둘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는 “많을 때는 각종 산악회 전세버스 100여 대가 늘어서 있었다”고 회고했다.

1980년 산에서 직접 솥에 밥을 지어 먹고 있는 등산객들. 지금은 지정된 장소에서만 취사가 허용된다.
1980년 산에서 직접 솥에 밥을 지어 먹고 있는 등산객들. 지금은 지정된 장소에서만 취사가 허용된다.
고속도로와 승합차가 바꾼 풍경

그러나 이러한 가이드 산악회의 ‘동대문 전성시대’는 1980년대 중반 이후부터 조금씩 쇠락하더니 1990년대 들어서는 완연한 쇠퇴기에 들어섰다는 것이 그의 기억이다. 그는 이에 대해 “전국에 고속도로가 사방팔방으로 뚫리고 기아의 봉고 등 좋은 승합차들이 많이 나왔기 때문”이라고 나름대로 분석했다.

돌이켜 보면 1970년대와 1980년대 ‘동대문 산악회’들의 경쟁력은 편리한 교통수단을 제공할 수 있다는 점이었다. 당시만 해도 전국의 도로가 발달하지 않아 유명한 산으로 가는 길이 불편했고 또 자동차를 소유한 사람도 적었다. 가이드 산악회 초창기만 해도 서울 시내에서 도봉산을 가려 해도 시외버스를 타야 했고 설악산을 가려면 험한 일정상 2박 3일은 기본으로 잡아야 했다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등산객들은 산악회의 버스를 자주 이용했다. 또한 전국의 깊은 산을 다녀 본 이들이 적었기에 산속에서는 산악 가이드들의 길 안내에 의존해야 했다. 당시에는 지금만큼 전국 산의 길과 이정표가 정비되지 않았다.

그러던 것이 고속도로가 발전하고 친한 친구들끼리 승합차를 타고 손쉽게 여행을 하게 되면서부터 산악회에 의존하지 않고 직접 산을 찾아가는 사람들이 늘어났다는 것이다. 자가용 승용차를 직접 몰고 가는 이들도 크게 늘었다. 또 국립공원 등 유명한 산들의 등산로와 이정표가 잘 정비되면서 가이드에게 의존하지 않고도 산행이 가능해졌다.

2013년 지리산에서 등산객들이 미리 준비한 도시락을 먹고 있다. 동아일보DB
2013년 지리산에서 등산객들이 미리 준비한 도시락을 먹고 있다. 동아일보DB
기억의 대비-과거와 현재

수십 년간 그의 눈에 비친 등산 풍속도는 많이 바뀌었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산에서의 취사 행위다. 가이드 산악회 초창기에는 식비를 따로 받지 않았다고 했다. 함께 가는 사람들이 반찬과 쌀을 가져와서 함께 음식을 해 먹었다고 한다. 그와 함께 오랫동안 산행을 해온 초창기 고객들 중에는 아직도 당시 산에서 음식을 해 먹었던 일을 잊지 못하는 이들이 있다고 한다. 그러나 1990년 11월부터 자연공원법에 따라 전국의 국립공원 내에서 지정된 장소 외에서의 취사와 야영이 금지됐다. 그전에는 사실상 산속 어디에서나 취사 행위를 했었다. 그러나 자연 훼손이 심각한 지경에 이르자 정부가 강력 단속에 나섰고 이후 점차 산중 취사 행위는 사라졌다.

반면 최근에는 산에서의 음주 행위가 크게 늘었다는 것이 그의 관찰이다. 이전에는 술을 마시더라도 산을 내려와서 마시는 ‘하산주’가 대세였는데 요즘에는 산에 올라가서 술을 마시는 ‘음주 산행’이 크게 늘었다는 것이다. 그는 “1990년대 말 외환위기를 겪으면서 서서히 음주 산행이 생겨나더니 2000년대 들어 크게 늘었다”고 말했다.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이 늘어난 탓이라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마음을 달랠 길 없는 사람들이 막걸리 한 병씩 들고 산에 와서 시름에 잠기다 가곤 했다”는 것이다. 산에서 술 마시는 사람들이 조금씩 늘어나다 보니 점차 음주 산행에 대한 경각심이 줄어들었는지 요즘엔 음주 산행이 만연하고 있다는 것이다. 음주 산행은 음주 운전과 마찬가지로 산에서의 사고 위험을 크게 높이기 때문에 자제해야 한다.

또 하나 빼놓을 수 없는 변화가 등산 패션이다. 초창기에는 미군 군복을 물들인 옷을 입고 군화를 개량해서 신었다. 해외에 다녀온 사람이 외제 등산화와 버너를 사오면 몰려가서 구경하기 바빴다고 했다. 다 같이 가난해서 그때는 등산복도 상대적으로 소박했다고 했다. “등산할 때 좋은 옷을 입어야 한다는 법이 있는 것은 아니잖아요. 언제든 편한 복장으로 갈 수 있다는 것도 등산의 좋은 점이죠. 그런데 요즘엔 산에 가면 패션쇼 무대를 방불케 합니다. 해발 700∼800m 산에 가면서 에베레스트(해발 8848m)에 가는 듯한 장비를 가져간다고들 해요. 일부에서는 등산복 가격에 너무 거품이 많이 끼었다고들 합니다. 그러나 저는 개인적으로는 이런 현상을 꼭 나쁘게만 보지는 않습니다. 이게 다 우리가 먹고살 만해졌다는 증거 아니겠어요?”

업계에 따르면 2000년 2000억 원 정도였던 아웃도어 시장의 전체 매출액은 지난해 6조9000억 원에 이를 정도로 폭발적으로 성장했다. 그러나 지난해 총 매출액이 당초 8조 원대에 이를 것이라는 전망에는 다소 못 미쳤다. 최근 경기 불황으로 아웃도어 업체들의 성장세도 다소 둔화되리라는 관측이 나오고 있다.

산악회 수가 크게 늘어난 것도 눈에 띄는 현상이다. 1991년 그가 사회체육진흥회 등산중앙회장을 맡을 때는 78개 가이드 산악회가 가입돼 있었다고 한다. 등산중앙회에 가입하기 위해 당시 500만 원의 가입비를 내기도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그런 모습은 찾아볼 수 없다. 가이드 산악회에 의존하지 않고도 누구나 손쉽게 산악회를 만들어 산행을 즐기는 시대다. 그는 “요즘엔 인구 1000명당 산악회가 1개 있다고 추산합니다. 전국적으로 산악회가 5만 개는 될 거라고 봅니다”라고 말했다. 정치인들이 나서서 산악회를 만들기도 하고 친목회가 산악회로 바뀌기도 한단다. 등산은 누구나 손쉽게 즐길 수 있고, 건강에도 도움이 되기 때문에 갈수록 인기를 끌고 있는 데다 마음이 맞는 몇 명만 모이면 즉석에서 산악회를 만들 수 있기 때문에 산악회가 폭증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가운데 상업 가이드 산악회들은 어려움을 겪고 있다. 많은 이들이 다른 일을 찾아 떠났다.

많이 줄어들기는 했지만 가이드 산악회는 요즘 장거리 산행에서 틈새시장을 찾고 있다. 서울 근교의 가까운 산을 오를 때는 직접 차를 몰고 가거나 지하철 버스 등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아무리 도로가 발달해도 등산 후의 장거리 운전은 부담스럽다. 이런 점에 착안해 장거리 산행을 원하는 이들에게 버스 등의 교통편을 제공하는 것이다. 서울에서 지리산, 설악산은 물론이고 남해의 섬에 있는 산에까지 당일 또는 무박 2일로 다녀오는 산행 상품을 제공하는 곳이 많다. 서울에서 금요일 오후 10시경 출발해 다음 날 새벽 지리산에 도착해 산행을 한 뒤 그날 밤 늦게 서울로 올라오는 식이다. 과거에는 동대문 인근에서 출발하는 버스가 많았지만 요즘엔 서울 외곽으로 빠지는 도로 인근의 지하철역을 몇 군데 정한 뒤 그곳에 버스들이 들러서 손님을 태우고 출발한다.



다시 찾는 100대 명산의 추억

최 회장은 그동안 산악회에서 총 1500회에 걸쳐 고객들과 함께 산행을 했다. 그의 장부에 기록한 횟수라고 한다. 친구들과 단출하게 떠난 산행까지 합하면 3000회가 넘을 것이라고 했다. 설악산과 지리산은 각각 100번도 넘게 다녔다고 한다. 전국의 산 중 2000개는 넘게 가보았다고 했다. 중국과 일본의 산에도 자주 다녔다. 이런 현장 경험 때문에 그는 2002년 ‘세계 산의 해’를 맞아 산림청이 전국 100대 명산을 선정(참조 산림청 홈페이지 www.forest.go.kr)할 때 선정위원으로 참여하기도 했다. 그는 요즘 당시 선정한 100대 명산을 고객들과 다시 찾고 있다. 체력이 다하기 전에 다시 한 번 찾고 싶어서다. 한 달에 3번 정도로 총 3년 계획을 세웠다. 술도 줄이고 체력 관리를 하고 있다.

“하느님을 믿는 사람들이 교회에 가고 부처를 믿는 사람들이 절에 가듯이 저는 그냥 산에 갑니다. 몸이 아파도 갑니다. 산에 가면 그냥 맘이 편해요. 산은 저에게는 교회 같고 절 같고 병원 같습니다.”

그 스스로는 전국의 명산 1호로 설악산을 꼽는다. 아기자기한 모습과 웅장한 모습을 함께 갖췄고 울창한 숲 등 모든 것이 갖춰져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100대 명산에 속하지는 않지만 숨겨진 명산으로 그는 경기 가평의 고동산(591m)을 꼽았다. 그가 힘들 때마다 찾는 그만의 힐링 장소다. 설악산 공룡능선의 축소판인 듯 능선이 화려하고 주변 경치가 뛰어나다고 한다.

전남 고흥 팔영산에서 만났던 개 ‘흰둥이’도 기억에 남는다고 했다. 주차장에서부터 산악회원들을 기다리곤 하던 이 개는 마치 전문 가이드가 등산로를 안내하는 것처럼 산악회원들 앞에 서서 등산 코스를 걷곤 했다는 것이다. 흰둥이는 2000년대 초까지 산악인들 사이에서 팔영산 안내견으로 통하며 인기를 끌었다고 한다.

사람과 자연뿐 아니라 사람과 사람 사이도 산에서는 더 좋아질 수 있다고 그는 믿는다. 세월 속에서 많은 것이 변했지만 변하지 않고 있는 것은 사람들의 산에 대한 애정이다.

이원홍 기자 bluesky@donga.com
#산악회#등산#산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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