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석]“끔찍한 근로환경은 옛말… 청년들, 중동 도전 겁먹지 말라”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4월 1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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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동건설 붐 주역’ 이병옥 前 한양 사우디아라비아 지사장

쿠웨이트시티 중심가의 한 커피숍 앞에서 이병옥 전 한양 사우디아라비아 지사장이 왼쪽 주먹을 불끈 쥐며 “중동하면 열사의 사막만 떠올리지만 1970년대와는 여건이 완전히 달라졌다. 취업이 안 된다고 좌절하지만 말고 편견없는 시선으로 새로운 도전을 하기를 바란다”고 조언했다. 쿠웨이트시티=하정민 기자 dew@donga.com
쿠웨이트시티 중심가의 한 커피숍 앞에서 이병옥 전 한양 사우디아라비아 지사장이 왼쪽 주먹을 불끈 쥐며 “중동하면 열사의 사막만 떠올리지만 1970년대와는 여건이 완전히 달라졌다. 취업이 안 된다고 좌절하지만 말고 편견없는 시선으로 새로운 도전을 하기를 바란다”고 조언했다. 쿠웨이트시티=하정민 기자 dew@donga.com
《 지난달 초 박근혜 대통령의 중동 방문 후 “대한민국 청년이 텅텅 빌 정도로 한번 해보세요. 다 어디 갔느냐고, 다 중동 갔다고”라고까지 말하며 ‘제2의 중동 붐’을 말하자 오히려 청년들은 ‘니(네)가 가라, 중동’이란 말을 유행시키며 냉소했다. 그렇지 않아도 연애 결혼 출산 인간관계 주택 구입을 포기한 소위 ‘5포 세대’에게 뜬금없는 청년고용정책을 내놓아 화를 돋웠다는 것이다. 그런데 정말 중동은 기회의 땅일까. 마침 기자는 최근 시리아 난민 지원 국제회의가 있었던 쿠웨이트를 방문할 기회를 가졌다. 대통령의 첫 순방지였던 쿠웨이트를 찾은 김에 1970년대 중동 특수를 경험하고 지금도 현지에 살고 있는 분으로부터 ‘중동의 현재’를 알아보고 싶었다. 》

물어물어 만난 사람은 중동에 약 30년간 거주하며 본인 스스로 기억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호텔 아파트 공장 등을 지었다는 이병옥 전 한양 사우디아라비아 지사장(67). 그는 쿠웨이트(1978∼1981년)를 필두로 사우디아라비아(1981∼1986년), 나이지리아 보츠와나 남아프리카공화국(1987∼1989년), 한국(1990∼1995년), 다시 쿠웨이트(1996년∼현재) 등 세계 곳곳의 건설 현장을 누빈 중동 붐의 주역이자 한국 건설업계의 산증인이다.

중동에서 바친 건설인생 40년

1978년 10월 그가 직접 완공한 쿠웨이트시티의 5성급 호텔인 셰러턴호텔 앞에 선 37년 전의 이병옥 전 지사장. 이병옥 씨 제공
1978년 10월 그가 직접 완공한 쿠웨이트시티의 5성급 호텔인 셰러턴호텔 앞에 선 37년 전의 이병옥 전 지사장. 이병옥 씨 제공
2일 쿠웨이트시티의 한 커피숍에서 만난 그는 억센 경상도 사투리로 반갑게 인사를 하며 자리에 앉자마자 빛바랜 사진 한 장을 꺼냈다. 사진 속엔 한양이 1978년 10월 완공한 쿠웨이트시티의 5성급 셰러턴(쉐라톤)호텔 앞에 선 37년 전의 그가 있었다. 그는 사진 속 호텔을 가리키며 “섭씨 55도를 넘나드는 혹서(酷暑)보다 가난이 더 무서워 하루에 12시간씩 일하며 지은 자식 같은 호텔”이라고 말했다.

1973년 한양주택개발로 출발한 한양은 1976년 해외 건설사업에 뛰어들었다. 같은 해 홍익대 건축학과를 졸업한 젊은 건축학도 이 전 지사장도 한양에 입사했다. 중동 건설 붐에 힘입어 한양은 곧 국내 10위권 건설사로 성장했고 그의 건설 인생 40년도 시작됐다.

―왜 하필 중동이었나.

“내가 영화 ‘국제시장’ 세대다. 경남 함안이 고향인데 1949년 천연두와 콜레라가 유행했다. 동네 아이 12명 중 나만 빼고 다 죽었다. 바로 1년 뒤에 6·25가 터졌다. 영화가 묘사한 것보다 더 고통스러운 시절이었다. 내 초봉이 10만 원이었다. 중동에 가면 20만 원을 준다길래 아내에게 물어보지도 않고 냉큼 지원했다. 첫 발령지가 쿠웨이트였는데 어디 있는 나라인지도 몰랐다. 그저 가족을 먹여 살려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이곳에 도착했을 때의 소감은….

“1978년 4월이었는데 비행기 트랩을 내려올 때 느낀 열기와 습기가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수도 쿠웨이트시티는 1년 평균 기온이 섭씨 46도로 세계에서 가장 더운 도시다. 4월부터 10월까지는 낮에 일을 할 수 없을 정도다. 6∼8월에는 섭씨 50도가 기본이다. 요즘이야 에어컨이 있어서 건물 안에 들어가 있으면 더위도 잘 못 느끼지만 그때만 해도 잠시 세워둔 차 시동을 걸려다 뜨거운 운전대에 화상을 입을 정도였다.

한낮을 피해 오전 4시부터 오후 1시까지만 일하고 남은 일은 밤에 다시 했지만 별 효과가 없었다. 열기를 식힌다고 사방에 분무기를 틀어 습도가 말도 못했다. 도착한 지 며칠 만에 온몸이 땀띠로 뒤덮였다. 변변한 약도 없는데 땀띠는 갈수록 심해지고 가렵다고 긁으면 피딱지가 앉고….”

그가 목이 마른 듯 냉수 한 잔을 들이켰다.

50도 폭염속 12시간씩 땀 흘려

―더위 외에 힘든 점은 없었나.


“내가 구조역학(구조물에 외부의 힘이 작용할 때 내부가 어떻게 변형되는지 연구하는 학문) 전문가다. 내가 배운 모든 지식은 일본공업규격(JIS) 기준이었다. 쿠웨이트가 영국 식민지였던 탓에 여기 오니 무조건 영국공업규격(BS)에 맞춰야 했다. 일본식에 익숙한 내게 영국식은 외계어처럼 낯설게 느껴졌다. 자재, 자재의 규격과 강도, 공정 방식, 인건비 계산법이 완전히 달랐다. 기존 지식으로는 공사를 진행할 수가 없었다. 모든 것을 새로 배워야 하니 힘들었다. 할 수 없이 밤이고 낮이고 BS 규정집을 끼고 살았다. 영국 단기 연수까지 다녀왔다. 당시 영국서 만난 아일랜드인이 한 말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코리아에서 왔다고? 아프리카에 있는 나라인가? 그런데 얼굴은 흑인이 아니네.’”

그의 말이 이어졌다.

“현장에서 만난 한국인 근로자들끼리의 마찰도 견디기 힘들었다. 소위 화이트칼라와 블루칼라의 대립이 심했다. 갓 서른이던 내가 감독을 하며 간섭을 하니 어느 날은 오십 줄에 들어선 건장한 체격의 십장(什長)이 대형 쇠망치를 들고 덤비며 ‘머리에 피도 안 마른 놈이 건방지게 굴어? 너 이 자식 죽여 버린다’며 씩씩거리더라.”

―그 거친 현장을 어떻게 제압했나.

“내가 시키는 대로 하지 않으면 허가가 나지 않으니 인부들도 나중엔 별 수 없었다. 규정을 달달 외우고 있으니 나만 한 전문가가 없었다. 점차 시간이 지나자 나를 ‘박사’라고 부르면서 ‘이 박사가 시키는 대로 하면 아무 탈이 없어서 좋다’고 했다. 어떤 의미에선 그만큼 순수한 사람들이었다.”

―한국에는 자주 다녀갔나.


“요즘 건설 회사들은 해외 근무자의 경우 4개월마다 한 번씩 2주간 휴가를 준다. 우리 때는 2년에 한 번씩 들어와 1주일 있다 간 게 고작이었다. 37세, 35세, 30세 된 딸 셋이 있는데 아버지 노릇을 전혀 못했다. 태어날 때에도 곁에 있어주지 못하고 같이 놀아준 적도 없다. 맏이와 둘째가 제일 심했는데 오죽하면 집에 올 때마다 둘이서 나를 보고 ‘아저씨 누구세요?’라고 물었겠나. 한번은 오랜만에 집에 와서 아내와 함께 잠들었는데 아이 울음소리에 깼다. 첫째와 둘째가 안방 문 앞에서 펑펑 울고 있는 게 아닌가. 항상 저희 둘이서 엄마와 잤는데 갑자기 이상한 아저씨가 들이닥쳐 엄마를 뺏어가니 무섭고 화가 났던 거였다(웃음). 지금이야 이렇게 웃으면서 말하지만 당시에 내 가슴은 미어졌다.”

뛰어난 의료-교육-교통 인프라

그는 더이상 가족과 떨어져 살아서는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에 걸프전이 발발한 1990년 귀국한다. 하지만 5년 만에 쿠웨이트로 돌아왔다.

“한국에 돌아와 재벌 회장 집을 여러 채 지었다. 돈도 제법 벌었는데 재미가 없었다. 쿠웨이트가 그리워졌다.”

그가 회상에 잠긴 듯 잠시 호흡을 가다듬었다.

“한국의 건설업은 접대나 뇌물 없이는 일이 안 됐다. 쿠웨이트 사람들은 ‘인샬라(신의 뜻대로)’를 입에 달고 살고 행동도 느려 터졌지만 그런 걸로 괴롭히지는 않았다. 한국에서는 ‘일’만으로는 승부가 나지 않았다. 여자 나오는 술집에서 흥청망청 노는 것도 한두 번이지 몇 번 되풀이되자 진절머리가 났다. 결국 가족을 설득해 모두 데리고 쿠웨이트로 돌아와 현지 건설업체에 취직했다.”

이 대목에서 그에게 “아무리 쿠웨이트가 산유 부국이라 해도 의료, 교육, 교통 같은 사회 인프라가 한국만 못하지 않은가”라고 묻자 그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여기 기름값이 1L에 200원이다. 농수산물 가격도 싸다. 한국에서는 1만 원으로 장을 보면 사과 한 개, 감자 몇 알로 끝이지만 여기선 각종 채소와 과일을 수북하게 담을 수 있다. 의료 서비스도 좋다. 나와 아내의 보험료가 1년에 100디나르(약 37만5000원) 정도인데 이 돈만 내면 사실상 무상의료다. 몇 년 전 아내가 유방암과 담석증 수술을 받았는데 추가 비용이 전혀 없었고 경과도 훌륭하다. 술과 유흥을 엄격히 금지하는 아랍문화의 특성상 가족과 많은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것도 장점이다. 특히 열한 살 때 이곳으로 데려온 막내에게 첫째와 둘째에게 해주지 못한 아버지 노릇을 실컷 할 수 있었다. 막내가 이탈리아 로마대 건축학과를 졸업했다. 수업 중 ‘가장 존경하는 건축가’를 말하라고 해서 ‘한국과 쿠웨이트를 발전시킨 아버지’라고 답했다는 말을 듣고 그만하면 행복한 인생이라고 생각했다.”

한국인 대부분 감독-행정업무

―대통령이 방문하고 돌아간 뒤 청년들에게 ‘중동행’을 권했다. 정말 중동은 기회의 땅인가.

“물론이다. 중동은 내가 처음 온 1970년대에도 지금도 변함없는 기회의 땅이다. 당장 쿠웨이트만 봐도 최근 몇 년간 신도시, 정유공장, 철도, 지하철 건설 등 대형 공사가 속속 발주되었고, 앞으로도 발주될 예정이다. 공사 규모도 기본 10억 달러(약 1조1000억 원) 이상이다. 게다가 이곳 사람들이 갖고 있는 한국인과 한국 건설업체에 대한 인식이 매우 좋다. ‘불타는 한여름에 움직이는 건 한국인과 도마뱀 뿐’이란 말이 있을 정도다. 나 같은 건설업계 관계자들만이 아니다. 주사우디아라비아 대사를 지낸 고 김정기 전 대사가 누님 시동생이다. 사돈이기 전에 부산고 선배여서 사돈이 되기 전부터 각별하게 지냈다. 이분이 2000년 초 예멘에 출장을 갔다가 바이러스에 감염돼 1년 넘게 투병하다 2001년 6월 뇌척수막염으로 돌아가셨다. 생전의 김 전 대사가 ‘한국이 지금보다 더 잘사는 나라가 되려면 더 많은 사람이 중동에 와야 한다’고 입버릇처럼 말씀하신 게 잊히지 않는다.”

―젊은 세대들은 힘든 중동에 우리가 왜 가야 하느냐고 말한다.


“요즘 한국인들은 대부분 감독이나 행정 일을 한다. 업무 여건이 내가 일할 때와는 비교할 수 없이 좋아졌다. 우리와 선배 세대가 만들어놓은 거지만 한국에 대한 인식도 매우 좋다. 코리안이라고 하면 모두 환대한다. 남의 말만 듣고 지레 안 된다고 생각하거나 겁먹지 말고 일단 한번 나와서 직접 판단해 보라고 조언하고 싶다. 나를 ‘꼰대’라 불러도 할 수 없지만 이제 자식 세대들로부터 ‘그동안 고생 많이 하셨습니다. 이제 저희가 중동의 발전을 이어가겠습니다’라는 말을 한 번쯤은 듣고 싶다.”

쿠웨이트시티=하정민 기자 dew@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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