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이진녕]박근혜 문재인이 새 길을 내면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2월 2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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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녕 논설위원
이진녕 논설위원
이재오 새누리당 의원이 2006년 4월 당시 야당이었던 한나라당 원내대표 때 일이다. 울산에 내려가 있는데 노무현 대통령이 직접 전화를 해 조찬을 제의한다. 다음 날 아침 청와대 관저로 가니 여당인 열린우리당의 김한길 원내대표가 먼저 와 있었다.

노무현이 김한길에게 “김 대표님. 이번엔 이 대표 손들어 주시죠. 야당 원내대표 하기 힘드는데 양보 좀 하시죠”라고 말하면서 두 사람 간에 언쟁이 시작된다. 당시 사립학교법 재개정 문제로 여야가 대립하면서 국정이 마비 상태였다. 이재오가 민망해 내실의 화장실로 잠시 자리를 피했는데 그곳까지 목소리가 들릴 정도로 두 사람은 언성을 높여 다퉜다. 김한길이 “당에 보고하겠다”며 가버리자 노무현은 이재오를 데리고 직접 청와대 경내를 구경시켜주었다고 한다.

이명박 정부 시절 이 의원한테 직접 들은 일화다. 그는 한참 뒤인 2013년 8월 자신의 트위터에 이를 소개했다. 우리 정치사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장면은 아니다.

2005년엔 노 대통령이 선거제도 개편을 전제로 한나라당에 대연정을 제의했다가 박근혜 대표한테 퇴짜를 당한다. 열린우리당의 반발도 극심했다. 대통령 노릇 하기가 얼마나 힘들었으면 이런 제의까지 했을지, 솔직히 당시는 진지하게 생각해보지 않았다. 만약 실제 대연정이 성사됐으면 어떻게 됐을지도 궁금하다.

나는 6년 전쯤 여야 간 협상 사령탑인 원내대표들이 마치 남북회담 하듯 어렵게 만나는 행태를 ‘여야 분단정치’라는 칼럼으로 비판한 적이 있다. 주례회동이 정착된 지금과 비교하면 격세지감을 느낀다. 사실 이렇게 된 지도 8개월밖에 안 된다. ‘한 발을 디디니 길이 생겼다’는 말이 실감난다. 길이 만들어지면 주고받는 것이 생기고 소통이 싹튼다. 혹독한 인사청문의 시련을 거친 이완구 총리가 첫 인사차 야당을 찾았을 때 우윤근 새정치민주연합 원내대표가 눈물을 보인 것도 그 길에서 싹튼 정 때문 아니겠는가.

나는 우리 국민의 메마른 정서와 갈등의 상당 부분이 정치 탓이라고 본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처럼 인간은 정치적 동물이기 때문이다. 손가락 하나로 세상의 소식을 접할 수 있는 시대에 허구한 날 편을 지어 저주에 가까운 증오를 표출하는 정치를 보면서 무엇을 체득하겠는가. 그런 살벌한 적대(敵對)가 정치의 본령인가. 그런다고 자신의 위상이 올라가고 더 좋은 세상, 더 살기 좋은 나라를 만들 수 있나. 증오도 은혜와 마찬가지로 되로 주면 말로 돌아오는 법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박근혜 대통령과 문재인 새정치연합 대표가 지금껏 아무도 가보지 않은 새 길을 내보기를 바란다. 두 사람은 여느 대통령과 야당 대표의 관계와는 다르다. 더 좋은 대한민국을 만들겠다며 대통령후보로 나서 겨룬 사람이다. 국민통합도 약속했다. 박 대통령은 51.6%, 문 대표는 48%를 득표했다. 혼자서는 아무리 애써봤자 반쪽 통합밖에 못 이루지만 둘이 의기투합하면 100% 통합에 다가갈 수 있다. 박 대통령의 경제 활성화를 통한 성장, 문 대표의 소득주도 성장은 어느 한쪽을 택하면 다른 쪽은 버려야 하는 양자택일의 카드가 아니다.

때마침 문 대표가 어제 “청와대 개편이 끝나면 박 대통령에게 경제와 안보 관련 회담을 제의할 것”이라고 밝힌 것은 고무적이다. 사실 더 아쉬운 쪽은 박 대통령이니 이런 제의를 해도 먼저 하는 게 옳다. 그러나 한 번의 형식적인 만남으로는 부족하다. 두 사람이 아무 조건 없이 한 달에 한 번, 또는 두 달에 한 번이라도 만나 대화하는 모습을 보여줬으면 좋겠다. 그런 식으로 새 길을 내면 정치가 달라지고, 국민의 눈빛이 달라질 것이다.

이진녕 논설위원 jinnyong@donga.com
#박근혜#문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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