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판 커버스토리]해외 이민자의 후손들 한국으로 역이민 러시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1월 2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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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년 전엔 ‘먹고살기 힘들어’ 떠났지만

독립기념관이 공개한 멕시코로 이민 간 한국인 노동자들의 사진. 멕시코 한인 이주는 1905년 시작됐으니 올해는 110년을 맞는 해이기도 하다. 독립기념관 제공
독립기념관이 공개한 멕시코로 이민 간 한국인 노동자들의 사진. 멕시코 한인 이주는 1905년 시작됐으니 올해는 110년을 맞는 해이기도 하다. 독립기념관 제공
한인의 해외 진출은 조선 말기인 1864년 러시아 연해주 이주부터 집계되기 시작했다. 당시 연해주 주둔 동시베리아 개척부대장 올덴부르크 대령이 1864년 9월 “한인 14가구(남녀 65명)가 올 1월 조선에서 연아무르주(당시 연해주)로 이주해 농사를 짓고 있다”고 보고한 것이 근거다. 지난해를 한인의 러시아 이주 150주년으로 기념한 것도 이 때문이다.

1883년 조선의 ‘월강금지령’이 폐지돼 해외 이주에 대한 족쇄가 없어졌고 1903년엔 미국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으로 첫 노동이민이 시작됐다. 1905년 5월 멕시코 살리나 크루즈항에 한인 1031명이 도착한 것을 기점으로 올해는 멕시코 한인 이민 110주년이 된다. 당시 에네켄(용설란의 일종) 농장에서 일해 ‘애니깽’으로 불렸던 멕시코 한인은 노예 같은 생활 속에 애타게 그리던 고국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삶을 마감하기도 했다.

일제강점기(1910∼1945년)에는 망명이민이나 강제이민이 많았다. 일제는 만주사변 이후 만주 개발을 위해 집단이주를 실시했고 소련은 극동 러시아에 있던 한인 18만여 명을 ‘일본과 내통할지 모른다’는 혐의를 씌워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시켰다. 중일전쟁(1937년) 이후 태평양전쟁 기간(1941∼1945년) 동안 일본으로의 강제 동원도 급증했다.

광복이 됐지만 해외체류 한인의 수는 크게 줄지 않았는데 일본(60여만 명), 중국(111여만 명)과 소련 거주 동포의 상당수가 해방 조국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현지 잔류를 택했기 때문이다. 6·25전쟁을 겪고 나서는 미국 이주 사례가 크게 늘었다. 미군과의 결혼, 유학 등이 주요 요인이었다.

1962년은 재외동포사에서 분기점이 되는 해다. 정부는 당시 ‘해외이주법’을 제정해 국가 정책적으로 해외 이주를 적극 장려했다. 1인당 국민소득이 1400달러(약 153만 원)에 불과해 ‘먹고살기 힘든’ 조국을 등지고 ‘보다 나은 삶’을 찾아 떠나는 생계형 이민이 많았다. 한국 기업의 해외 진출이 늘면서 이주지역도 다각화했다.

1989년 여권법 개정과 해외여행 자유화, 그리고 뒤이은 냉전 해체와 소련 붕괴는 갈 수 없는 나라의 한계를 없앴다. 공산권 국가와 수교가 늘면서 그야말로 ‘글로벌 이민’이 가능해진 것. 전 세계 어디에도 한국 사람 없는 곳이 없다고 할 만큼 재외동포의 규모와 범위가 확대됐다. 하지만 이제는 “한국만큼 살기 좋은 곳이 드물다”며 한국으로 귀환하는 동포가 늘고 해외에서 태어나 한국으로 들어오는 역이민 현상도 나타나고 있다.

조숭호 기자 shcho@donga.com
#해외#이민자#후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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